고려말의 반원개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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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고려말의 상황

Ⅲ. 고려후대 왕들의 개혁정책
1. 충선왕의 개혁
2. 개혁위원회를 설치한 충목왕
3. 공민왕의 개혁
4. 공민왕 개혁의 실패 원인

Ⅳ 공민왕과 신돈

Ⅴ결론

본문내용

아니었다. 이처럼 신돈의 신분이 승려였던 점은 개혁주체 세력으로서의 사상적 한계를 그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의 신임을 기회로 점차 오만해져서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으므로 점점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가 되어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로 왕을 유혹, 서울을 충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오도도사심관이 되려다 왕의 불신을 받았다.
여기서 공민왕은 신돈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 지금껏 신돈의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공민왕의 개혁의지 때문이었는데, 신돈이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여긴 공민왕은 스승을 구하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다.
개혁추진 5년여 만인 공민왕 19년에 왕은 신돈에게 역모의 혐의를 씌워 수원으로 유배보낸 후 다음해 1371년 사형을 시켜버렸다.
결국 신돈의 개혁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공민왕과 신돈의 좌절은 단지 두 사람의 좌절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두 사람의 좌절은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고려 지배층 내부의 개혁이 실패로 끝났음을 뜻한다. 이제 개혁의 주도권은 고려 왕실에서 신흥사대부로 완전히 넘어가게 됐다.
Ⅴ결론
원간섭기 이후 고려왕조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들은 바로 이 시기의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원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등장한 부원적 권문세족이 더욱 심하여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탐학과 불법행위를 자행 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던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들의 정치적 비리를 비판·제거하려는 개혁운동을 전개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은 아직 미미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에 따라 개혁운동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공민왕이 즉위하는데, 공민왕 즉위 무렵에는 원나라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왕권 강화와 정치적·사회적개혁 및 반원친명정책을 골자로 하는 개혁정치를 단행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혁신정치도 개혁추진세력이 지니는 한계성과 권문세족의 반발, 홍건적·왜구의 빈번한 침구 등으로 인해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더욱이 고려 왕권은 무인정권에 의해 제약되던 왕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원나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후에도 왕실은 물론 고
려의 지배세력들은 원나라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반원친명정책은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띌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의 개혁정책은 지속적으로 투쟁한 결과물이었으나 결국 왕 본인들의 의지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개혁의 의지는 오늘날에도 동일한 일면이 많이 보인다고 볼수 있다. 오늘날 한 국가의 총수가 뜻을 피려 하면 국가의 보수세력과 언론들이 들고 있어나 그의 의지를 막고, 여론을 조작하려 하는등 이러한 모습들에서 고려후기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면들이 개혁의지의 부족으로 나타난 만큼 앞으로의 역사에서도 경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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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27
  • 저작시기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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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28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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