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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물음을 버리라고 할 수 있다. 물음이 잘못되었으니 물음을 바꾸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예수님이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를 본다. 그것은 대개 물음이 잘못된 경우다. 물음은 답의 수준을 결정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묻는 만큼 안다. 아는 만큼 안다. 그러면 그렇게 아는 만큼 아는 데서 끝나는가?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답하는 데, 각 문화의 물음의 연장선에서 그 방식에 따라 답하시고 마는가? 묻지 않으면 답도 없다. 그러나 <이미 알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는 만큼 안다는 얘기는 아니다. 물음과 같은 수준에서 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답은 물음의 수준을 뛰어 넘는 수준으로 올 수 있다. 그 때 하나님은 물음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이 동문서답하는 것은 물음의 수준과 다른 방식으로 답할 때다. 예를 들어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합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은 <어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마태 19:17)고 했다. 선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다른 차원의 답이다. 이것은 복음이 당시 유대 문화의 전 이해와도 다른 각도에서 전해지는 것임을 말해 준다. 성서는 우리에게 물음을 바꾸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 전통에서 지니고 있던 물음의 방식과 다른 차원으로 하나님의 답이 주어질 수도 있다.
기독교 교리가 형성될 때도 마찬가지다. 헬레니즘 사회에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성서를 낳은 유대 문화와 다른 그리스 문화의 사고 방식이 교리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발도 굉장히 컸다. 성서를 당시 문화권에 설명하되 성서의 정신을 지키면서 비교적 사변적인 사고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였던 어거스틴의 경우가 그렇다. 그가 성서의 정신을 지키고자 했을 때 강조한 것이 물음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악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마니키아주의자들에게 주장했다. 말하자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통을 통해 물려받은 전 이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물으라는 얘기다. 그처럼 성서는 문화적 전 이해를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물으며 하나님의 답을 구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것은 상당한 문화 충격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우리 나라 개신교는 그런 문화 충격을 크게 겪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근본주의적인 신학이 들어와 초창기에 비교적 짧은 시간에 대 부흥을 이루었다. 물론 최병헌이나 김교신이나 함석헌처럼 우리 문화의 배경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는 분들이 있었지만 민중들에게는 상황 적합성을 문제삼지 않는 근본주의 신학이 잘 먹혀 들어갔다. 아마 구한말에 민중이 어려운 처지에 속했기 때문이리라. 내부의 오랜 세도 정치와 외부의 침략으로 국운이 흔들리고 민중의 삶이 허덕일 당시, 어떤 사상도 설득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던 것 같다. 절망은 말의 상실 곧 <할 말>을 잃는 모습을 띈다. 물음을 잃었으므로 전통의 전 이해를 버리고 새롭게 묻는 방식을 택하기가 비교적 쉬웠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리 나라 개신교는 이 땅에 존재했던 전 이해를 거치지 않고 성서를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물론 샤마니즘의 심성으로 성서를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우리의 본능적인 종교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물음의 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성서 앞에서 우리 전 이해를 따라 성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상당히 의식적인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땅에서 오랫동안 전 이해로 존재했던 유교나 불교나 도교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한다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기 때문에 충돌을 완화하는 신학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 나라의 토착화 신학자들이 하는 작업이 그런 것일 게다.
다시 물어보자. 그러면 이제 한국신학은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할 말을 하게 하기 위해서, 할 말을 했던 말의 방식을 따라 성서를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의 전 이해에 따라 하나님의 말을 알아들어야 하는가? 성서는 그것을 허락하는가?
우리는 적어도 이 땅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물었던 진지한 물음들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성서적 물음의 방식을 따라 가더라도 바로 그리 가지 말고 이 땅의 물음의 방식을 거쳐 성서적 물음의 방식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성서의 전 이해에는 우리의 전 이해와 양립될 것들이 상당히 많다. 두 개의 전 이해가 서로 이어져서 하나님을 이해할 때 제대로 이해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 그 때에 비로소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할 말을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성서의 전 이해를 따라 이해되기도 하지만 우리 전통의 전 이해를 따라 이해되기도 한다. 앞에서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 때문에 신학은 인간학과 경계선 상의 신학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하지만 사람이 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했다고 했다. 그런 신론에 바탕을 두고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자. 성서의 전 이해는 한국 문화 전통의 전 이해와 경계선 상에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유대 문화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말하시지만, 한국 문화 전통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말하시기도 한다. 성서는 그것을 허락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서는 답이지만 물음으로서, 진리를 찾는 다른 물음에 대해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국 문화의 물음의 방식에 대한 답으로 말하실 수도 있다는 것은, 유대 전통과 무관하게 이 땅의 철학적 사고 방식에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이 이 땅의 물음의 연장선에서 온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은 살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은 우리 뒤에서 우리를 덮치는 방식으로 오지 않고, 우리 앞에서 우리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오지만, 물음과 답 사이에는 불연속이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런 긴장이 없이 우리의 전 이해를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면 기독교의 흔적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가다머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성서 이해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생긴 지평들의 융합의 결과이지, 하나의 지평의 연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교리가 형성될 때도 마찬가지다. 헬레니즘 사회에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성서를 낳은 유대 문화와 다른 그리스 문화의 사고 방식이 교리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발도 굉장히 컸다. 성서를 당시 문화권에 설명하되 성서의 정신을 지키면서 비교적 사변적인 사고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였던 어거스틴의 경우가 그렇다. 그가 성서의 정신을 지키고자 했을 때 강조한 것이 물음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악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마니키아주의자들에게 주장했다. 말하자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통을 통해 물려받은 전 이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물으라는 얘기다. 그처럼 성서는 문화적 전 이해를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물으며 하나님의 답을 구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것은 상당한 문화 충격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우리 나라 개신교는 그런 문화 충격을 크게 겪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근본주의적인 신학이 들어와 초창기에 비교적 짧은 시간에 대 부흥을 이루었다. 물론 최병헌이나 김교신이나 함석헌처럼 우리 문화의 배경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는 분들이 있었지만 민중들에게는 상황 적합성을 문제삼지 않는 근본주의 신학이 잘 먹혀 들어갔다. 아마 구한말에 민중이 어려운 처지에 속했기 때문이리라. 내부의 오랜 세도 정치와 외부의 침략으로 국운이 흔들리고 민중의 삶이 허덕일 당시, 어떤 사상도 설득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던 것 같다. 절망은 말의 상실 곧 <할 말>을 잃는 모습을 띈다. 물음을 잃었으므로 전통의 전 이해를 버리고 새롭게 묻는 방식을 택하기가 비교적 쉬웠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리 나라 개신교는 이 땅에 존재했던 전 이해를 거치지 않고 성서를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물론 샤마니즘의 심성으로 성서를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우리의 본능적인 종교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물음의 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성서 앞에서 우리 전 이해를 따라 성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상당히 의식적인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땅에서 오랫동안 전 이해로 존재했던 유교나 불교나 도교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한다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기 때문에 충돌을 완화하는 신학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 나라의 토착화 신학자들이 하는 작업이 그런 것일 게다.
다시 물어보자. 그러면 이제 한국신학은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할 말을 하게 하기 위해서, 할 말을 했던 말의 방식을 따라 성서를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의 전 이해에 따라 하나님의 말을 알아들어야 하는가? 성서는 그것을 허락하는가?
우리는 적어도 이 땅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물었던 진지한 물음들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성서적 물음의 방식을 따라 가더라도 바로 그리 가지 말고 이 땅의 물음의 방식을 거쳐 성서적 물음의 방식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성서의 전 이해에는 우리의 전 이해와 양립될 것들이 상당히 많다. 두 개의 전 이해가 서로 이어져서 하나님을 이해할 때 제대로 이해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 그 때에 비로소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할 말을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성서의 전 이해를 따라 이해되기도 하지만 우리 전통의 전 이해를 따라 이해되기도 한다. 앞에서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 때문에 신학은 인간학과 경계선 상의 신학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하지만 사람이 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했다고 했다. 그런 신론에 바탕을 두고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자. 성서의 전 이해는 한국 문화 전통의 전 이해와 경계선 상에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유대 문화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말하시지만, 한국 문화 전통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말하시기도 한다. 성서는 그것을 허락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서는 답이지만 물음으로서, 진리를 찾는 다른 물음에 대해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국 문화의 물음의 방식에 대한 답으로 말하실 수도 있다는 것은, 유대 전통과 무관하게 이 땅의 철학적 사고 방식에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이 이 땅의 물음의 연장선에서 온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은 살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은 우리 뒤에서 우리를 덮치는 방식으로 오지 않고, 우리 앞에서 우리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오지만, 물음과 답 사이에는 불연속이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런 긴장이 없이 우리의 전 이해를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면 기독교의 흔적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가다머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성서 이해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생긴 지평들의 융합의 결과이지, 하나의 지평의 연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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