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에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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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중국의 통일왕조(581∼618).
<역사의 개략>
<정치>
<문화>
<고구려와의 관계>

본문내용

를 묵살, 거부하였다. 고구려의 태도에 화가 난 양제는 원정을 결심하고 전쟁준비에 총력을 기울여, 612년(영양왕 23) 제1차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수군(隋軍) 규모는 수군(水軍)을 제외한 육군만도 좌익 12군(軍), 우익 12군에 총수 113만 3800명, 군량운반자는 그 2배에 이르러, 출정 군사가 모두 탁군(郡:北京 부근)의 본진을 떠나는 데 40일이 걸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해전술에도 수군은 고구려군의 지략과 용맹에 고전하다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섬멸되어 개전 4개월 만에 전군을 철수하였다. 수나라는 613·614년 2차·3차의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수는, 고구려가 3차원정 때 제의한 강화(講和)조건에 따라 고구려 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였으나, 고구려 영양왕은 끝내 수나라에 가지 않았다. 수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무리하게 강행한 징발·사역 등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2차 원정 때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전국이 반란에 휩쓸려, 결국 고구려의 원정이 수왕조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모처럼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수는 3국에 정치적·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칠 기회를 맞았으나, 그 후반기의 잦은 원정·반란 등으로 인한 국력 소모로 자체의 문화조차 뚜렷이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렇다 할 문화적 교류도 없이 다만 승려들이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 건너간 데 그쳤으며, 간접적으로는 율령·관제(官制)·과거제도(科擧制度) 등 수에서 제정된 제도들이 당(唐)·송(宋)을 거쳐 통일신라와 고려에 전래되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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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18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1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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