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윗자리에
앉았다. 논평하여 말한다.
"원종(법흥왕)이 불법을 일으킨 후 비로소 진량(津梁-불교의 토대)이 설치되었지
만 아직 당오(堂奧-진리의 경지)에는 도달함이 없엇다. 그리하여 마땅히 귀계멸참(歸
戒滅懺-불교에 귀의하는 것)의 법으로 우매한 중생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광은 자신이 살던 가서갑에 점찰보(占察寶-법회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단)를 두고 이것을 상규로 삼았다. 이때 어떤 여승이 시주하다 밭을 점찰보에
바쳤는데, 지금의 동평군에 있는 밭 100결이 바로 이것으로 그때의 기록대장이 아직도
남아있다. 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말할 때에는 늘 웃음 띤 얼
굴이었고 노한 빛은 없었다. 그의 나이가 이미 많아 수레를 타고 대궐로 들어갔다.
그당시의 덕의(德義)있는 여러 어진 선비들이 있었으나 감히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풍부한 문장은 한나라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이 80여
세가 되어 정관 연간에 세상을 떠났는데 부도가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 당전에서는 황
룡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했는데,그 장소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아마 황룡사의
잘못인 듯한데 마치 분황사를 왕분사라 한 예와 같을 것이다.
위와 같이 당전과 향전 두전기에 따르면 그의 성씨는 박과 설로 되어있고, 출가
또한 동과 서로 되어 마치 두사람을 말한 것 같으나, 감히 상세하고 명확하게 단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두 전기를 다 적어둔다. 그리고 두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 이목
과 운문(모두 절이름)의 사실은 없다. 그런데 향인 김척명이 그릇 되이 항간의 말들을
윤색하여 원광법사전을 지으면서,함부로 운문사의 개조 보앙스님의 사적과 뒤섞어 하
나의 전기로 만들어 놓았다. 그후 해동승전을 엮은 이도 이의 잘못된 것을 그대로 기
록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때문에 이르 분별하고자 항 한 글자도
가감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적어둔다. 진,수의 시대에 해동 사람으로 바다
를 거너가서 도를 배운 자는 적었으며 설혹 있었다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시는 못
했다. 원광의 후에는 중국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 계속하여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바로 길을 연 셈이 되었다.
기리어 읊는다.
바다 건너 한나라 땅 구름 헤치고,
몇 사람이 오가며 밝은 덕 배웠던가.
오직 푸르른 산만이 옛 자취를 남겼지만
금곡(金谷)과 가서(嘉西-둘다 절이름)의 일 들을 수 있네.
앉았다. 논평하여 말한다.
"원종(법흥왕)이 불법을 일으킨 후 비로소 진량(津梁-불교의 토대)이 설치되었지
만 아직 당오(堂奧-진리의 경지)에는 도달함이 없엇다. 그리하여 마땅히 귀계멸참(歸
戒滅懺-불교에 귀의하는 것)의 법으로 우매한 중생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광은 자신이 살던 가서갑에 점찰보(占察寶-법회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단)를 두고 이것을 상규로 삼았다. 이때 어떤 여승이 시주하다 밭을 점찰보에
바쳤는데, 지금의 동평군에 있는 밭 100결이 바로 이것으로 그때의 기록대장이 아직도
남아있다. 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말할 때에는 늘 웃음 띤 얼
굴이었고 노한 빛은 없었다. 그의 나이가 이미 많아 수레를 타고 대궐로 들어갔다.
그당시의 덕의(德義)있는 여러 어진 선비들이 있었으나 감히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풍부한 문장은 한나라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이 80여
세가 되어 정관 연간에 세상을 떠났는데 부도가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 당전에서는 황
룡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했는데,그 장소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아마 황룡사의
잘못인 듯한데 마치 분황사를 왕분사라 한 예와 같을 것이다.
위와 같이 당전과 향전 두전기에 따르면 그의 성씨는 박과 설로 되어있고, 출가
또한 동과 서로 되어 마치 두사람을 말한 것 같으나, 감히 상세하고 명확하게 단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두 전기를 다 적어둔다. 그리고 두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 이목
과 운문(모두 절이름)의 사실은 없다. 그런데 향인 김척명이 그릇 되이 항간의 말들을
윤색하여 원광법사전을 지으면서,함부로 운문사의 개조 보앙스님의 사적과 뒤섞어 하
나의 전기로 만들어 놓았다. 그후 해동승전을 엮은 이도 이의 잘못된 것을 그대로 기
록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때문에 이르 분별하고자 항 한 글자도
가감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적어둔다. 진,수의 시대에 해동 사람으로 바다
를 거너가서 도를 배운 자는 적었으며 설혹 있었다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시는 못
했다. 원광의 후에는 중국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 계속하여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바로 길을 연 셈이 되었다.
기리어 읊는다.
바다 건너 한나라 땅 구름 헤치고,
몇 사람이 오가며 밝은 덕 배웠던가.
오직 푸르른 산만이 옛 자취를 남겼지만
금곡(金谷)과 가서(嘉西-둘다 절이름)의 일 들을 수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