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과거제도에 대하여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을 수 없을 정도로 진보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럽 사회와 비교해 볼 때 처음에는 매운 진보적인 것이었지만 후세에 이르러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다음으로 과거가 가진 우수한 장점은 그것이 극히 공평하게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답안 심사가 이름을 가린 채 좌석번호만을 근거로 이루어졌던 점도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과거는 자주 수험생 자신의 손에 의해 공정성이 왜곡되는 일이 발생했다. 컨닝용 작은 책자를 시험장에 갖고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심한 경우에는 비단 천으로 된 속옷에 온통 사서오경의 본문을 써 놓고 입장한다. 더 심각한 것은 대리인을 쓰는 경우이다. 이것은 고액의 보수를 받는 하나의 상거래로 성립되었다고 한다. 청조 말년인 19세기 후반인 되면서 특히 이러한 폐해가 극심해졌다. 수험생은 스스로 부정을 저지른 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만일 시험관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더욱 합격에 확실성을 갖는다고 믿었다. 이리하여 수험생과 시험관인 공모하는 것을 關節이라고 한다.
4.과거의 낙오자
전통시대 중국에서 관리가 되는 것은 가장 명예로우면서도 또한 가장 유리한 직업이다. 가 가운데 보기 좋게 최후의 영광을 얻은 사람의 환희란 알 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러 번의 시험에서 언제나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실의에 빠져 불만 속에서 즐겁지 못한 나날을 보내면서 잿빛 인생에 대해 불운을 원망하는 낙오자 무리를 낳은 것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당대에는 최후의 진사시험 급제자는 백 명 가운데 한두 명 꼴에 지나지 않았다. 송대에 들어가면 과거 지원자의 수는 갑자기 많아진다. 특히 3년에 한 번식 잇는 공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지방으로부터 상경하여 대기하는 사람이 항상 6천에서 7천 명에 이르고 공거의 시기가 되면 그 수가 금세 두 배로 증가한다. 명청대로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경쟁은 격심하게 된다. 생원에서 거인이 되기 위한 향시는 대개 백 명에 한 명이라는 비율로서 이것이 최대의 난간이다. 다음의 회시는 숫자상으로는 30명에 한 명의 합격률이지만 이미 충분히 선택을 거친 후의 경쟁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가장 치열한 경쟁이다. 결국 전국의 생원 가운데 실제로 시험에 응시했던 사람만을 세어보면 약 3천 명에 한 명이 진사의 지위를 획득하는 행운을 얻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억지로 버티면서 학업에 전력하여 비장한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오로지 과거를 향하여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재능이 있을 뿐아니라 활동적이고 야심이 있으면서도 불운 때문에 매번 낙제의 쓰라린 체험을 했던 사람은 실망에서 자포자기로 자포자기에서 반항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왕조 말기 사회가 혼란에 빠졌을 때 그들은 때가 왔다고 여겨 반란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그 지도자가 되어 현정권에 타격을 주면서 쌓였던 울분을 씻으려고 하는 것이다. 한 왕조 멸망의 이면에는 언제나 이처럼 지식계급 가운데 불평분자가 책동을 했던 흔적이 보인다.
5.과거제도의 붕괴
관리를 채용하는 데 시험을 실시한다는 것은 유럽 등에서는 최근까지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영국에서도 관리임용에 시험을 채택하기에 이른 것은 1870년 이후이고 미국은 더 늦은 1883년의 일이었다. 이후 각국이 모두 이것을 모방했지만 실은 이러한 관리등용 시험제도의 시작은 중국 과거의 영향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런데 유럽에서 산업혁명 이후 신문화가 일어나고 그 압력이 멀리 동아시아에 파급되자 이제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의 습득이 필요했다. 동아시아 여라 나라 가운데 이러한 형세를 잘 파악하여 재빨리 그것에 순응하여 성공한 나라가 일본이다.
Ⅲ. 결론
중국에서도 여러 번 유럽 여러 나라와 싸워서 패배한 경험 때문에 신기술을 습득할 필요를 일본 이상으로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 새로운 교육을 실시하는 곳을 학당이라고 불러 종래 구식의 학교와 구별했는데 이후 여러 종류의 학당이 각지에 창설되었다.
겨우 1901년 그 전해의 의화단 사건에서 고배를 마신 청조가 간신히 자각한 바 있어 전국적인 신교육 제도를 반포하였다. 이것을 육성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과거제도를 전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드디어 개혁파의 의견에 따라 1904년 5월의 과거를 마지막으로 1천 3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제도는 영구히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3.11.08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178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