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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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1) 민속예술
2) 전승설화

3. 결론

본문내용

에 나아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는 하늘에서 흑산장군에게 보내진 선녀인데 독산장군께서 자기가 흑산장군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흑산장군이 깜짝 놀라며
"이런 고약한 친구가 있나? "
하고 대들었다. 이로부터 두 장군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독산장군은 자기 집에 있는 돌을 흑산장군 있는 데로 던지고, 흑산장군은 반대로 흑산에 있는 흙을 독산으로 던졌다. 이렇게 둘이서 한참을 싸우다보니 독산의 돌은 흑산쪽으로 다 가서 독산이 되고, 흑산의 흙은 독산으로 다 가서 흑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 속의 독산은 돌산(石山)이고 흑산은 흙산(土山)이나 발음대로 표기하였다. 돌과 흙의 대비로서 갈등의 기조로 삼되 여기에 하늘에서 내려준 선녀를 대입함으로써 삼각관계에 의한 사랑싸움으로 꾸며진 게 흥미롭다 . 그리되 선악에 의한 2분법으로 인물을 설정하고서도 권선징악의 주제로 매듭짓지 않은 게 좀 다르다.
◈ 뜬 바위 (浮石)
금마면 신룡리 구룡 마을의 뒷산에 뜬 바위가 있다. 그런데 이 바위는 옛날에 어떤 힘센 장수가 이곳을 지내가다가 근처의 바위를 발견하고 그걸 집어다가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래쪽 바위와 위쪽 바위가 딱 붙게 올려놓은 것이 아니고 사이가 좀 뜨게 놓아졌기 때문에 뜬 바위라 하였다. 그런데 평소에는 위의 바위와 아래 바위가 딱 닿아 있지만, 섣달 그믐날이 오면 사이가 떠서 동네 사람이 실을 양쪽에서 팽팽히 쥐고 위아래 사이에 끼어 넣고 잡아 당겨보면 실이 전혀 걸리지 않고 빠져나오는 걸 본다는 것이다.
뜬 바위는 여러 곳에 있으며 전설 역시 흔하다. 다만 두 바위가 섣달 그믐날이 오면 사이가 뜨인다는 건 고대인의 독특한 형상개념 즉 물활론적(物活論的) 사고로 무생물에 인격을 부여하여 사람의 행위처럼 인지하려는 것이다.
◈ 기준(箕準)이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胎峰山)
지금의 삼기면 연동리에 태봉사(胎峰寺)가 있다. 이 절 안에는 결가부좌(結跏趺座)한 여래좌상(如來坐像)의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이 있는 삼존석불(三尊石佛)을 모시고 있다. 현재의 이 삼존석불은 태봉사를 창건한 심묘련씨가 약 70여 년 전 3대 독자인 아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사신 기도를 드리다가 산신(山神)의 현몽으로 이 석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절을 지었다 한다. 그런데 절이 있는 산 이름이 태봉산(胎峰山)이라 한 데는 한 전설이 있다. 그것은 일찍이 기준(箕準)이 이산에다 아들의 태(胎)를 묻었다는 것이었다. 전설로는 바로 기준이 세 아들의 태를 묻었던 자리에 삼존불상이 있어 그가 이 석불에 기원하여 세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 때문에 지금껏 아들을 원하는 아녀자들이 이 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는 풍속이 있다.
이는 조선왕 기준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좌우 궁인들을 데리고 바닷길로 남하하여 한(韓)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마한(馬韓)이라 했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가 도래한 곳이 확실히 금마저(金馬渚)였는지 또한 그가 마한을 세웠는지 아니면 마한을 쳤는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어쨌든 기준이란 역사적 인물과 연관시켜 기자(祈子)의 풍속을 설화로 만들었다는 게 특이하다.
◈ 인석(人石)의 애틋한 사랑
지금의 금마(金馬)는 옛 익산의 읍 자리인데 여기서 남쪽으로 3킬로쯤 가면 내를 사이에 두고 논 가운데 두 개의 입불(立佛)이 서 있는데 이것이 인석이다. 이 두 개의 인석 사이에 옥룡천(玉龍川)이란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금마의 지형은 동서북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남쪽만은 터져 있어 허허한 들판이 되어있다. 그래서 이 허한 남쪽을 막기 위하여 이 인석을 세웠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지형이 말의 형국으로 되어있어 마부(馬夫)가 있어야 하는 바 이 마부 노릇을 시키기 위하여 여기에 인석을 세웠다고도 한다.
또한 이 인석은 하나는 남자고 하나는 여자라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인석은 둘 사이를 가로막고 흐르는 옥룡천 때문에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꽁꽁 얼어붙게 되면 그때 두 인석은 내를 건너 서로 껴안고 그동안 맺혔던 긴한 정회를 풀었다가 닭이 울면 헤어져서 제자리에 선다고 하였다.
금마의 지형이 말의 형상이고 남쪽이 허하여 인석을 세웠다함은 풍수설에 의한 이야기다. 그런데 금마의 지형이 말(馬)의 형상이라 한 것은 단순히 지명의 어의에 따른 것일 뿐 실제와는 다르다. 본시 금마(예전에는 乾馬)의 마(馬)란 크다의 뜻(馬韓:큰 나라)이지 짐승의 말과는 다르다. 인석이 섣달 그믐날 밀회를 한다는 로맨스는 칠석(七夕)날 견우직녀(牽牛織女)의 전설과 유형을 같이 하나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두 별인데 비하여 석물인 까닭에 언내를 건너 만나는 이야기로 하자니 섣달 그믐날 밤으로 설정했을 것이었다. 어쨌든 두 석불을 남녀 상사(相思)의 상으로 꾸몄다는 게 자못 흥미 있는 일이다.
결 론
2차 과제를 부여받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난감하였다. 민속자료를 어느 곳에서 조사하는 것이 적절할지에 대한 고민만 해도 오래 걸린 듯 하다.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과연 익산에서 전승되는 민속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라는 걱정을 했었는데, 막상 이곳저곳 다니면서 여러 분야의 민속대상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 중 과제 작성에 옮길만한 몇 가지를 선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이번 과제를 위해 캠퍼스 안에 위치한 박물관을 1학년 때 이후로 다시 방문하였는데 건성으로 지나쳤던 물건 및 시설들이 관심과 흥미로 다가왔다. 특히 설화를 알아보면서 전에 한국문학 강의시간에 배우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익산에서 전승되고 있는 설화는 서동과 선화공주, 미륵사 창건연기설화만 알고 있었는데 더 많은 설화들이 있었다는 것과 하나의 주제로 한 설화가 전승되어오면서 그 형태가 조금씩 변화되어 소재가 약간씩 다르다는 것이다. 유적지로서의 역사적 배경이 짙은 백제 이후의 설화들을 접하면서 그 시대· 지역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문학 더 나아가 익산고장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보람된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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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3.11.29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5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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