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칭기스칸 (1167~1227)
몽고 제국을 건설한 영웅
칸의 일생
-칸의 리더십과 성공요인
칭기즈칸의 전략과 리더십
몽고 제국을 건설한 영웅
칸의 일생
-칸의 리더십과 성공요인
칭기즈칸의 전략과 리더십
본문내용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몽골군의
전령은 10마리의 말을 끌고 달리며 교대로 말을 갈아 타며 2000리를 내리 달렸다고 기록
되어 있다. (지금의 부산과 평양까지의 거리쯤 될까?) 식량은 어떻게 하느냐? 그들의 말
안장 밑에는 말린 고기가 깔려 있는데 사방 60센티 가량의 방석같은 고기가 소두마리
분량이라고 한다. 물만 부으면 완전한 우주식량이다. 적어도 병사 한명이 몇 달치 식량을
깔고 달리는 것이다. 몽골의 영광 속에 더욱 놀라운 것은 역참제도이다. 소도 카라코쿰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공용도로를 개설하였고 일정 거리마다 역을 세웠는데 그의 손자
오고타이칸이 즉위할 무렵에는 역전을 위한 말이 20만필, 역사만도 1만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도로운영으로 상인이 다니게 되었고 로마교황의 사자가 다녔으며 마르코
폴로 부자도 이 길로 몽골에 이르게 된다. 강력한 지휘명령 체계로 군율이 잡힌 조직력과
기동력! 이것이 칭기즈칸 리더십의 핵심적 성공비결이다.
칭기즈칸의 리더십 비밀 아홉번 째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교역의 장려였다. 그가 대칸에
오르자 엄청난 재보가 들어 왔다. 서방의 이란이나, 아라비아의 산물이 받쳐 졌는데 이런
먼 나라의 진기한 물건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위그르인들에 의해서였다. 대부분의 위그르
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의 사라센 제국은 8, 9세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쇠퇴해 진 상태이지만 그들의 왕성한 교역활동은 여전하였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국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위그르인들의 교역활동을 돌봐 주었다. 한편 그들
도 칭기즈칸의 무력에 의해 교역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중세국가에서 서로 다른 종교의 이교도들을 적으로 보는 반면, 실사구시적인
정신으로 이교도를 통하여 국익을 증가하였고, 그 같은 개방정책으로 선진화된 문명과
각종 과학기술이 교류되었다. 또한 칭기즈칸의 사후에 호레이즘의 수도 사마르칸드를
점령하였을 때 종전의 섬태멸진 전법에 의해 대부분의 주민을 몰살시켰는데 기술을 가진
자들 즉 공예가나 직인들 3만명은 죽이지 않고 몽고 본토로 후송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유럽에서 동방에 이르는 길목에는 각종 소국이 자리 잡아 통행하기가 곤란하였고, 중간
중간의 험한 길에는 온갖 길에 도적들이 들끓어 동서교류가 곤란하였으나 원대에 이르러
동서왕래가 활발해 졌으니 세계 인류사의 과학문명의 발전을 3세기 가량 앞당겼다는 평가
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칭기즈칸 리더십의 마지막 비밀은 훌륭한 그의 참모에 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인재를
두어 각종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야율초재(耶律楚材)이다. 그는 칭기즈칸이
두 번째로 금정벌할 때 중도의 성을 지키고 있던 26세의 늠름한 청년이었다. 그는 금에 의해
멸망한 거란족 요나라의 귀족이었는데 유불선 3교에 통달하고 모든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
었다. 이 자를 불러 칸은 말했다. "요와 금은 원수지간이다. 내가 금을 무찔러 그대의 원수를
갚았노라" 그러자 초재는 하나의 두려움도 없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조도,
나의 부친도 모두 금의 조정에 봉사하였다. 한번 신하가 된 이상에는 어찌 두 마음을 품고
주군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겠나 이까?" 이 대답이 마음에 들어 그를 항상 곁에 두고 정치
상담역으로 삼았다.
외적요인 내적요인
(환경) (개인)
개인의 강점(S)
개인의 약점(W)
외부기회(O)
SO전략:Maxi-Maxi
WO전략:Mini-Maxi
외부위협(T)
ST전략:Maxi-Mini
WT전략:Mini-Mini
징기스칸의 리더십 유형!!!!!!!!!!!
전령은 10마리의 말을 끌고 달리며 교대로 말을 갈아 타며 2000리를 내리 달렸다고 기록
되어 있다. (지금의 부산과 평양까지의 거리쯤 될까?) 식량은 어떻게 하느냐? 그들의 말
안장 밑에는 말린 고기가 깔려 있는데 사방 60센티 가량의 방석같은 고기가 소두마리
분량이라고 한다. 물만 부으면 완전한 우주식량이다. 적어도 병사 한명이 몇 달치 식량을
깔고 달리는 것이다. 몽골의 영광 속에 더욱 놀라운 것은 역참제도이다. 소도 카라코쿰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공용도로를 개설하였고 일정 거리마다 역을 세웠는데 그의 손자
오고타이칸이 즉위할 무렵에는 역전을 위한 말이 20만필, 역사만도 1만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도로운영으로 상인이 다니게 되었고 로마교황의 사자가 다녔으며 마르코
폴로 부자도 이 길로 몽골에 이르게 된다. 강력한 지휘명령 체계로 군율이 잡힌 조직력과
기동력! 이것이 칭기즈칸 리더십의 핵심적 성공비결이다.
칭기즈칸의 리더십 비밀 아홉번 째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교역의 장려였다. 그가 대칸에
오르자 엄청난 재보가 들어 왔다. 서방의 이란이나, 아라비아의 산물이 받쳐 졌는데 이런
먼 나라의 진기한 물건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위그르인들에 의해서였다. 대부분의 위그르
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의 사라센 제국은 8, 9세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쇠퇴해 진 상태이지만 그들의 왕성한 교역활동은 여전하였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국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위그르인들의 교역활동을 돌봐 주었다. 한편 그들
도 칭기즈칸의 무력에 의해 교역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중세국가에서 서로 다른 종교의 이교도들을 적으로 보는 반면, 실사구시적인
정신으로 이교도를 통하여 국익을 증가하였고, 그 같은 개방정책으로 선진화된 문명과
각종 과학기술이 교류되었다. 또한 칭기즈칸의 사후에 호레이즘의 수도 사마르칸드를
점령하였을 때 종전의 섬태멸진 전법에 의해 대부분의 주민을 몰살시켰는데 기술을 가진
자들 즉 공예가나 직인들 3만명은 죽이지 않고 몽고 본토로 후송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유럽에서 동방에 이르는 길목에는 각종 소국이 자리 잡아 통행하기가 곤란하였고, 중간
중간의 험한 길에는 온갖 길에 도적들이 들끓어 동서교류가 곤란하였으나 원대에 이르러
동서왕래가 활발해 졌으니 세계 인류사의 과학문명의 발전을 3세기 가량 앞당겼다는 평가
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칭기즈칸 리더십의 마지막 비밀은 훌륭한 그의 참모에 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인재를
두어 각종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야율초재(耶律楚材)이다. 그는 칭기즈칸이
두 번째로 금정벌할 때 중도의 성을 지키고 있던 26세의 늠름한 청년이었다. 그는 금에 의해
멸망한 거란족 요나라의 귀족이었는데 유불선 3교에 통달하고 모든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
었다. 이 자를 불러 칸은 말했다. "요와 금은 원수지간이다. 내가 금을 무찔러 그대의 원수를
갚았노라" 그러자 초재는 하나의 두려움도 없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조도,
나의 부친도 모두 금의 조정에 봉사하였다. 한번 신하가 된 이상에는 어찌 두 마음을 품고
주군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겠나 이까?" 이 대답이 마음에 들어 그를 항상 곁에 두고 정치
상담역으로 삼았다.
외적요인 내적요인
(환경) (개인)
개인의 강점(S)
개인의 약점(W)
외부기회(O)
SO전략:Maxi-Maxi
WO전략:Mini-Maxi
외부위협(T)
ST전략:Maxi-Mini
WT전략:Mini-Mini
징기스칸의 리더십 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