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말
2. 안토니아스라인
3. 피아니스트
4. 프리스트
2. 안토니아스라인
3. 피아니스트
4. 프리스트
본문내용
생각을 했었다. 유대인들은 독일군에 의한 그들의 참혹한 역사를 어떠한 식으로든 잘 알리고, 그럼으로써 가슴을 가진 사람 누구나라도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소위말하는 편으로 만들기를 잘 하는것 같다.그런데 그에 반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역시 일본인에 의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유대인의 학살을 아는만큼 우리네의 역사를 아는 전세계의 사람이 몇이나 될까? 유대인은 많은 분야에서 활략하고 있어서? 아니면, 나라의 규모나 경제력때문에?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달라져야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의 아픈 역사를 보고 끌어안기에는 우리네의 역사가 더 아프지 않은가?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쨌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로만 폴란스키의 대작 피아니스트는 세월이 지나도 언제까지나 큰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프리스트
마지막으로 내가 선택한 영화는 동성애를 다른 시각에서 종교와 접목시켜 보이는 작품이다. 나는 사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나 소설을 의도적으로 피해왔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부끄럽고, 더 비겁하게 말하면, 흉측한 것들 이였다. 그들이 극소수이고, 많은 사람들이 닦아놓은 길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그들을 이방인 취급했다. 나와는 동떨어진 세상의 이야기 따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작정이였다. 동성애라는 그리고 그와 비슷한 부류의 생각과 가치관들은 예전보다는 더 당당해진 모습으로 스크린이나, 방송매체, 등을 타게 되었고, 그로써 나는 많은 혼란을 느꼈었다. 그러다가 그 즈음에, 학교에서 한 강의를 듣게 되었고, 나는 그 강의에서 동성애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이 영화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동성애를 남성은 남성을, 여성은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정의를 내릴 수 밖에 없었던 나에게 이 영화는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생각을 전환하고 환기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강의에서 이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만을 듣고 이 영화의 테입을 구하기 위해 어디든 갔었다. 영화가 조금은 오래된 영화라, 구하기가 쉽지 않았었지만, 결국은 지금 내 방에 가지런히 꽃혀 있다. 상세한 감상을 말하기 전에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겠다.
젊은 카톨릭 신부 그렉은 새로운 교구에 발령을 받아 일한다. 그런데 그는 사실 동성애자로 때로는 신부복을 벗고 가죽잠바를 입고 거리에 나가 남자들을 만난다. 그러다 그는 그래험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나가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 가끔 거리로 나서긴 하지만 그는 이 사실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하고 그 외 신부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한편 그렉은 교구의 한 소녀로부터 아버지에게 매일 성폭행을 당한다는 고백성사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카톨릭 규정상 신부는 고백성사 받은 내용을 절대 폭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며 기도를 한다. 그러다 그렉은 그레험과의 동성애 사실이 폭로되고 교인과 카톨릭 측은 그에게 엄청난 비난을 쏟아붓는다. 그런 상태에서 유일하게 진보적인 매튜 신부만이 그를 옹호해주고 싫다는 그를 시켜 성찬식을 주도하도록 한다. 하지만 모든 교인들은 매튜 신부에게서만 성찬식을 하고 아무도 그렉 신부에게 가지 않는다. 그런데 단 한 명,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다는 고백성사를 했던 소녀만이 그에게 가고 급기야 그렉은 그 소녀에게 엎드려 울음을 터뜨린다.(참조)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카톨릭 교회의 반발은 심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동성애만으로도 충분한 죄악으로 여겨지는데, 금혼의 규율이 엄격한 신부가 동성애자라니...교회의 반응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꺼 같다. 사회가 요구하는 형식과 질서는 거부했지만 순수한 종교적 열의만은 굽히지 않았던 두 신부를 부끄럽게 생각한 미 카톨릭 교회의 그런 모습이 영화에서 똑같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오래전부터 문제시 되어왔던 종교의 모순을 보여준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한 규율과 법칙만이 중시되는 교회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안토니아 버드가 바라보는 현대 카톨릭의 모습은 상당히 비관적이다. 관용과 사랑은 용납되지 않고 오직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카톨릭. 안토니아 버드는 현대의 카톨릭을 거부하는 듯이 영화 첫 장면에서 성당 창에 던지는 모습을 통해 교회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감독은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의 불합리함에 대해 비추는데, 그렉 신부가 멍하니 TV의 화면을 응시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는 TV를 보기 위해 리모콘으로 채널을 선택하려 하지만 TV에서는 화면 조정용 화면만이 보일 뿐이다. TV채널을 선택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삶에는 선택의 길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TV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더욱 커지면서 그가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느 아이와 신부라는 신분에 의해 구속받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절대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대해 주인공은 혼란을 껸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의 동성애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는 시종일관 선택에서 갈등하고 지쳐가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토니아 버드는 소박한 희망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빈민가에서 다시 미사를 드리게 된 그렉 신부를 비난하고, 그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홀로 남겨진 그렉 신부의 곁에 다가오는 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근친상간의 피해자 리사였다. 상처로 얼룩진 두 사람은 포옹하고 그렉 신부는 가슴에 담아두었던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 서로 상처입은 사람들의 용서와 화합. 이것이야말로 안토니아 버드가 이 영하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오만과 편견으로 둘러싸인 사회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리사와 그렉이 하나가 되는 순간 우리는 절망 끝에서의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안토니아 버드는 그들에게 희망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의 화합에도 무관심한 사람들처럼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도 편견의 눈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을 따갑게 바라볼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속에 인간의 욕망과 행복에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고뇌적인 작품이라 감히 평를 내려 본다.
프리스트
마지막으로 내가 선택한 영화는 동성애를 다른 시각에서 종교와 접목시켜 보이는 작품이다. 나는 사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나 소설을 의도적으로 피해왔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부끄럽고, 더 비겁하게 말하면, 흉측한 것들 이였다. 그들이 극소수이고, 많은 사람들이 닦아놓은 길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그들을 이방인 취급했다. 나와는 동떨어진 세상의 이야기 따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작정이였다. 동성애라는 그리고 그와 비슷한 부류의 생각과 가치관들은 예전보다는 더 당당해진 모습으로 스크린이나, 방송매체, 등을 타게 되었고, 그로써 나는 많은 혼란을 느꼈었다. 그러다가 그 즈음에, 학교에서 한 강의를 듣게 되었고, 나는 그 강의에서 동성애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이 영화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동성애를 남성은 남성을, 여성은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정의를 내릴 수 밖에 없었던 나에게 이 영화는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생각을 전환하고 환기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강의에서 이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만을 듣고 이 영화의 테입을 구하기 위해 어디든 갔었다. 영화가 조금은 오래된 영화라, 구하기가 쉽지 않았었지만, 결국은 지금 내 방에 가지런히 꽃혀 있다. 상세한 감상을 말하기 전에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겠다.
젊은 카톨릭 신부 그렉은 새로운 교구에 발령을 받아 일한다. 그런데 그는 사실 동성애자로 때로는 신부복을 벗고 가죽잠바를 입고 거리에 나가 남자들을 만난다. 그러다 그는 그래험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나가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 가끔 거리로 나서긴 하지만 그는 이 사실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하고 그 외 신부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한편 그렉은 교구의 한 소녀로부터 아버지에게 매일 성폭행을 당한다는 고백성사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카톨릭 규정상 신부는 고백성사 받은 내용을 절대 폭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며 기도를 한다. 그러다 그렉은 그레험과의 동성애 사실이 폭로되고 교인과 카톨릭 측은 그에게 엄청난 비난을 쏟아붓는다. 그런 상태에서 유일하게 진보적인 매튜 신부만이 그를 옹호해주고 싫다는 그를 시켜 성찬식을 주도하도록 한다. 하지만 모든 교인들은 매튜 신부에게서만 성찬식을 하고 아무도 그렉 신부에게 가지 않는다. 그런데 단 한 명,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다는 고백성사를 했던 소녀만이 그에게 가고 급기야 그렉은 그 소녀에게 엎드려 울음을 터뜨린다.(참조)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카톨릭 교회의 반발은 심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동성애만으로도 충분한 죄악으로 여겨지는데, 금혼의 규율이 엄격한 신부가 동성애자라니...교회의 반응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꺼 같다. 사회가 요구하는 형식과 질서는 거부했지만 순수한 종교적 열의만은 굽히지 않았던 두 신부를 부끄럽게 생각한 미 카톨릭 교회의 그런 모습이 영화에서 똑같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오래전부터 문제시 되어왔던 종교의 모순을 보여준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한 규율과 법칙만이 중시되는 교회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안토니아 버드가 바라보는 현대 카톨릭의 모습은 상당히 비관적이다. 관용과 사랑은 용납되지 않고 오직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카톨릭. 안토니아 버드는 현대의 카톨릭을 거부하는 듯이 영화 첫 장면에서 성당 창에 던지는 모습을 통해 교회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감독은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의 불합리함에 대해 비추는데, 그렉 신부가 멍하니 TV의 화면을 응시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는 TV를 보기 위해 리모콘으로 채널을 선택하려 하지만 TV에서는 화면 조정용 화면만이 보일 뿐이다. TV채널을 선택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삶에는 선택의 길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TV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더욱 커지면서 그가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느 아이와 신부라는 신분에 의해 구속받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절대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대해 주인공은 혼란을 껸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의 동성애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는 시종일관 선택에서 갈등하고 지쳐가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토니아 버드는 소박한 희망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빈민가에서 다시 미사를 드리게 된 그렉 신부를 비난하고, 그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홀로 남겨진 그렉 신부의 곁에 다가오는 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근친상간의 피해자 리사였다. 상처로 얼룩진 두 사람은 포옹하고 그렉 신부는 가슴에 담아두었던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 서로 상처입은 사람들의 용서와 화합. 이것이야말로 안토니아 버드가 이 영하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오만과 편견으로 둘러싸인 사회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리사와 그렉이 하나가 되는 순간 우리는 절망 끝에서의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안토니아 버드는 그들에게 희망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의 화합에도 무관심한 사람들처럼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도 편견의 눈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을 따갑게 바라볼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속에 인간의 욕망과 행복에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고뇌적인 작품이라 감히 평를 내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