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사에 대한 인식변천-단군과 기자에 대한 인식변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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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고려시기
1) 《삼국유사》 《제왕운기》 이전의 인식의 단편들
2)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나타난 단군과 기자에 대한 인식

3. 조선시기
1) 조선의 건국과 단군, 기자 인식
2) 조선 중기 사림파의 단군, 기자 인식
3) 조선후기 세계관의 변화와 단군, 기자인식

4. 개항 후~ 일제시기
1) 일제 식민지 사학의 연구-단군의 부정
2) 민족주의적 대응

5. 해방 이후
1) 북한 학계의 단군에 대한 연구 경향
2) 남한의 단군, 기자 연구경향

6. 결론

본문내용

국의 맥락에서 찬양함으로써 노골화되었다. 그리고 이는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한·미·일 삼각안보체제의 구체화와 함께 심화되어 갔다. 《桓檀古記》가 일본에서 역수입되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측면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대동아 공영권의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기존 학계에서는 이러한 제문제에 대해서 기존의 논의만을 되풀이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확인할 뿐, 서로의 의견교환이나 그를 바탕으로한 논의의 확대는 이루어지지 않아, 진정한 의미의 논쟁이 되지 못하였다.
김상호, 1988,〈고조선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금후의 과제〉《창작과 비평》가을.
이러한 단군에 대한 논의는 최근의 단군상 건립에 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부분은 단군 문제가 사실상 진정한 민족에 대한 관심이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포장하는 논리로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단군에 대한 인식은 현실성을 잃고 관념화되어 왔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해야 할 부분이다.
6. 결론
단군, 기자에 대한 인식은 문헌상의 자료가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앗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의 경우는 어떤 방식으로 전승되기 시작했는지 불확실하지만 단군의 경우 최초 국가에 대한 기억으로 삼국의 시조 신화가 전승되어 왔듯이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었든, 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해 왔든지 간에 역사적 경험으로 이어져 왔을 것이다.
단군에 대한 인식은 고려 말 몽고의 침입이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사회 내부적 단결을 위한 역사상의 모색으로 새롭게 부각되었고, 그 가운데 일정정도 역사의식의 진전이 있었다. 그것은 삼국을 넘어선 범위의 "역사공동체"에 대한 인식의 성립이었다. 이후 조선의 건국과정에서는 건국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표방하는 가운데, 단군을 중요하게 인식하면서 기자는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에 뒤지지 않는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는 측면에서 인식되었다. 이어지는 사림의 등장과 그들의 역사의식, 조선후기 양란을 겪으면서 요구되었던 사회 내적 개혁들과 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던 세계관의 변화는 역사인식의 변화와 함께 단군과 기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추동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단군, 기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각 지점에서 필요한 역사적 과제들에 부응하면서 이루어졌다.
근대 이후로 단군은 근대적 민족의 개념과 결부되면서 "대단군 민족주의"로 불릴만큼 민족통합, 단결의 구심점으로 인식되었다. 해방 후에도 북한의 연구경향은 그러한 인식을 답습, 강화해 갔고, 남한에서도 단군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반면 재야 학계를 중심으로 민족주의를 앞세우면서 별 다를 것 없는 인식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들은 각 시대의 강한 정치적 의도를 지니는 것이었고, 특히 해방 후 단군을 표방하며 내세운 민족주의라는 것도 사실은 허울에 불과하였고, 오히려 남북한 사회 각각의 발전 방향을 왜곡시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 과정에서 남북한의 역사의식이 매우 이질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국 다른 어떤 문제도 그러하겠지만, 단군, 기자에 대한 문제는 연구자가 어떠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상당히 상이해 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목적성을 띄고 교조적으로 이용될 때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럴 때, 단군과 기자에 대한 인식에 접근하는 문제는, 이들을 신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일 이상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즉, 누차 지적되어 온 것처럼 해석에 앞선 기초적 단계로서, 객관적 시각에서 폭넓게 "고조선사"를 연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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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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