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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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인상주의 유래와 의미>
<인상주의와 사진술>
<인상주의와 일본의 채색판화>
<인상주의와 산업화-도시화>
<모네 1840-1926>
<르느와르 1841-1919>
<드가 1834-1917>
<피사로 1830-1903>
<쇠라 1859-1891>
<시냑 1863-1935>
<세잔느 1839-1906>
<고흐 1853-1890>
<고갱 1848-1903>
<상징주의>
<나비파>
<뭉크 1863-1944>
<보나르 1867 -1947>

본문내용

1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20세기 초 포비즘과 큐비즘의 출현으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나비파>
1888년 9월 아카데미 쥘리앙의 간사인 세뤼지에는 고갱의 신기한 작품과 명확한 이론에 감명 받고, 아카데미의 젊은 동료들에게 이를 전했다. 이것을 발단으로 실질적인 그룹을 형성하여 89년 카페 보르피니에서 인상파와 종합주의의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세뤼지에를 중심으로 M.드니, L.보날, 뷔알, K.X.루셀, R.피오, P.E.랑송, H.G.이벨, 발로톤 등과 당시 화필을 잡은 조각가 A.마욜이 참가하였다. 나비파란 ‘예언자’를 뜻하는 헤브라이어(語)의 ‘나비’에서 따온 명칭으로, 시인 카자리스가 붙였다. 일찍이 인상파 화가들이 카페 게르부아에 모인 것처럼, 나비파는 보라리가(街)의 카페에 모여 토론하였다.
색채분석에 의존하여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인상파의 작품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만큼, 화면을 하나의 창조라고 생각하고 종합적인 구성을 시도하여 자신의 사색을 전개하는 고갱의 작품경향을 새로운 계시로 받아들였다. 평면적인 병렬(竝列)이나 장식적인 구성을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리는 형태나 색채는 오히려 작가의 해석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문단을 움직이던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같은 상징적인 작품을 그리는 O.르동과도 교류하였다. 나비파는 일반적인 성격 속에 다양한 경향을 내포하고 있어, 각 작풍(作風)으로 흘러감에 따라 집회는 자연적으로 해산되고 말았으나, 반인상주의 운동으로서 젊은 세대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 후 드니는 평면적인 구성을 발전시켜 장식적인 효과에서 설화화(說話畵)와 종교화를 개척하였다. 반대로 보날과 세뤼지에는 신변 제재를 정감 있게 묘사하여 색채를 정성스레 다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뭉크 1863-1944>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심한 이상성격자였으며, 일찍이 어머니와 누이를 결핵으로 여의고, 그 자신도 병약하였다. 그와 같은 환경과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풍에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1881∼1884), 급진적인 그룹의 영향을 받았는데, 초기작품 《병든 아이》에서 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응시는, 그 후의 작품에서 일관하고 있다. 1889년 한여름을 바닷가의 마을에서 보내고, 신비스러운 밤의 불안을 잡아 《별이 있는 밤》 《백야(白夜)》 등을 그렸다. 1890년 파리로 가서 레옹 보나의 아틀리에에 들어갔으나 파리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본의 목판화(木版畵)와 피사로와 로트레크의 작품이었으며, 고갱과 고흐의 매력이었다. 1892년 가을, 베를린미술협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것들은 초기의 애수 어린 서정적 성격을 더욱 내면화하고, 생(生)과 사(死),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고 있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뭉크의 독자적인 세계가 확립된 것이다. 게다가 베를린에서의 스트린드베리와의 만남은 그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그 후 파리에서는 말라르메 등과 사귀고 입센을 알게 되었으며, 명작 《생명의 프리즈》 연작을 완성하고, 18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하였다. 1908∼1909년에는 신경병으로 코펜하겐에서 요양하였으며, 그 후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버렸다.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판화가로서도 근대의 대작가이며 표현파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이재(異才)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보나르 1867 -1947>
1889년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고갱의 영향을 받은 그들과 반인상파인 나비파(派)를 결성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흑갈색을 기조로 한 차분한 색감으로 파리시민의 일상생활을 상징적으로 그렸으나 40대에 접어들면서는 회색조에서 서서히 밝은 색조로 이행하였다. 독특한 시각에서 잡는 기지적(機智的) 구도로, 풍경, 멱감는 나부(裸婦), 정물 ·사람이 모인 부드러운 실내정경 등을, 소박하면서도 감미로운 정감으로 그려, 뷔야르와 함께 대표적인 앵티미스트로 높이 평가되었다.
색채에 대한 관심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져 60세를 지나면서 선명한 명색의 조화를 추구하였으며, 차차 대상의 설명에서 벗어나 현란한 명색이 교향하는 독자적인 색채의 세계를 확립,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프랑스의 르 카네에 은거하여 제작에 몰두하였으며, 전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작품으로는 《빛을 등지고 있는 누드》 등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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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9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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