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만든 29 인 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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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쇼토구태자 (聖德太子 573-621)

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源賴朝 1147-1199)

3.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1534-1582)

4.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1536-1598)

5.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

6.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 1563-1600)

7.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1835-1867)

8.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1827-1877)

9. 오쿠보 도시미쓰(大久保利通 1830-1878 )

10.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1909)

11.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1899-1965)

12. 다나카 가쿠에이 (田中角營 1918-1993)

~

본문내용

인된 마지막 거물이라는 지적이 있을 만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시자카 이후 경단련 회장으로 큰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인물이며, 일찍이 과감한 M&A를 통해 일본 산업계 재편의 모형을 제시하였고, 임시행정조사회 회장으로서 일본사회 개혁의 최전방에 서서 초보수적인 일본사회곳곳에 메스를 들이댄 인물이다. 아직 개혁이 미진한 일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일본이 바뀌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강한 톤으로 주장한 몇 안되는 현대판 선각자이다.
28.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1921-1999)
아이치현의 주조장 '고노히마쓰(子の日松)'에서 모리타 규자에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44년 오사카대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45년 해군 기술중위로 임관하였다가 같은해 10월 제대한 다음 도쿄공업대학 전문부 강사가 되었다. 1946년 5월 (주)도쿄통신공업을 설립하여 이사로 취임한다. 1950년 전무이사로 승진하고 일본의 최초녹음기인 G형을 발매하였다. 1953년부터 트랜지스터 연구를 개시하여 1954년 미 웨스턴 일렉트릭사로부터 트랜지스터 기술을 도입한다. 1955년 2월 제품에 SONY 마크를 처음 사용하고 8월에 일본 최초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발매한다. 1957년에는 세계최초의 포켓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발매하고 1958년 1월 회사명을 (주)소니로 변경한다. 1961년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고 1961년 미국에서 ADR을 발행하여 자본금을 크게 늘리고 1965년 10월에는 미 IBM사와 기술원조 및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한다.
1970년 소니 주식이 뉴욕, 런던,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 1971년에는 홍콩 1972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고 소니기술연구소가 개설되었다. 1979년에는 워크맨을 발매하고 1986년에는 베스트셀러 '메이드인저팬'이 17개국에서 출간되고 1988년에는 CBS 레코드, 1989년에는 미 콜럼비아 영화사를 매수한다. 1990년 9월 미·일·유럽의 11개국 브랜드 조사에서 소니가 '신뢰도 넘버 원'으로 선정되었고 1999년, 타임지에 의해 20세기를 빛낸 20명의 기업인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일본인답지 않게 미국에서 승부를 건 최초의 기업인이다. 기술자 출신이면서 일찍이 영업책임자를 자청하고 나서, 거소를 미국으로 옮긴 후 미국에서의 판매에 승부를 걸었다. 일본인 기준으로 볼 때 턱없이 큰 주택을 사들여 미국인을 초청, 수시로 연회를 개최하는 등 폭넓은 교제를 통해 미국사회에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한편으로 소니의 일본 본사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모리시타가 미국시장에서 먼저 선보이는 영업전략이 맞아 떨어지면서 미국내 시판 성공, 이후 일본 시장 진출의 형식을 확립해 나갔다. 이같은 방식을 통해 선발 기업인 마쓰시타, 도시바, 빅터, 히타찌, 미쓰비시, NEC 등의 두터운 벽을 허물어 나갈 수 있었다. 일본인이면서 미국인의 사고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비즈니스를 전개하면서 일본 기업 특유의 발상과 자세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깨인 일본인이었다. 미국인이 가장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고 하는 그였지만, 그는 이시하라신타로와 더불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인'을 쓰기도 하였다. 미국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그가 일본과 일본지도자들의 미국과 미국지도자를 대하는 자세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29.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1955- )
형광체 메이커인 중소기업 니치아(日亞)화학공업에서 근무하다가 청색발광 다이오드(LED)와 보라색 레이저를 발명한 후 미 캘리포니아 산타바러라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하는 연구자. 청색 LED는 신호기에 사용되기 시작, 야구장의 대형 디스플레이 등 차세대 조명용 광원체로 각광받고 있으며 보라색 LED는 현재 쓰이고 있는 적색 LED에 비해 기억용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 디지털 정보를 기록하는 DVD에의 응용이 기대되고 있다.
묵묵히 일하던 그가 2000년 초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대학 교수로 떠나면서 그의 사건은 두뇌유출의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창의성을 막는 일본식 사회는 쇠퇴한다”면서 일본을 떠났다. 회사는 그의 개발로 100여건의 특허와 연간 수백억 엔의 이익을 벌고 있지만 그에게 돌아온 보상은 과장 승진과 특별수당 2만엔(약 20만원)뿐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 학자들은‘슬레이브 나카무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는 기술자가 프로야구선수처럼 성과를 올리면 막대한 급료를 지불하거나 활약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준다. 이에 비해 일본의 기술자 환경은 초라하기만 하다”고 말하고 있다.
2001년 8월 23일 도쿄 지방법원에 과거 근무처인 니치아를 상대로 LED에 대한 특허권 확인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기술자가 개발한 특허는 소속 기업에 귀속하는 것으로 여겨왔던 일본인 만큼, 이례적 소송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 지 주목을 끌고 있다. 나카무라씨는 니치아에 귀속한 특허권을 자신이 되찾고 LED 개발로 니치아가 번 수익중 20억엔을 ‘정당한 보수’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후 히타치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제기되는 등 연구자들의‘반란’이 계속되면서 팀플레이를 강조하던 일본기업들이 개인보상 제도를 만들고 있다. 소니와 일본빅터 등은 특허를 따면 목돈을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했고, 한 제약회사는 최고 1억엔 까지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섰다.
"일본은 연구자의 의욕과 창의성을 샘솟게 만드는 곳이 아니다. 1993년 청색 LED를 발명,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을 때도 나에겐 돌아온 것은 별 것이 없었다....억만장자 꿈꺾는 사회는 망한다....미국 연구자들은 정말 무섭게 파고드는데 이에 비하면 일본은 어린애 수준이다....일본식 평등주의 밑에선 연구자의 의욕이 살아날 수 없다”고 말하는 나카무라 슈지, 현대 일본기업이 안고 있는 문제점의 하나를 여실히 입증해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이처럼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근로자들 덕분에 그동안 일본기업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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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19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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