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개화기시조.
(1) 개화기시조의 작가
(2) 개화기 시조의 특징
(3) 개화기시조의 내용
(4)개화기 시조 작품
2. 개화기 한시
(1)문학과 사상의 전통성 수호
(2)개화․계몽의 지향
(3)전통의 계승과 혁신
(4)우국과 저항의 정신
Ⅲ.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개화기시조.
(1) 개화기시조의 작가
(2) 개화기 시조의 특징
(3) 개화기시조의 내용
(4)개화기 시조 작품
2. 개화기 한시
(1)문학과 사상의 전통성 수호
(2)개화․계몽의 지향
(3)전통의 계승과 혁신
(4)우국과 저항의 정신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15)은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한 초기 의병항쟁의 대표적인 지도자이다. 일찍이 <강화양란>과 같은 우국시를 쓰고 있으며, <追悼一國死義義士>, <토왜소>, <詠五七賊> 등합병을 전후하여 여러 편의 우국시를 내놓았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지부복궐척화의소>로 1876년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 반대하는 거센 상소를 올렸으며, 세태가 어지러울수록 성현의 도리를 굳게 지켜 잘못을 척결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척사위정의 준엄한 논리를 천명했다.
이강년(李康秊, 1858-1908)은 을미서가 때 유인석, 이인영 등과 기의하였다가 정미의거에도 다시 참가, 호서 창의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운강선생창의록』에 전하는 자탄시 한 수와 임절시 한 수가 있다. 특히 임절시는 순국의 최후가 너무도 처절하게 새겨져 있으며, 최후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 장부의 기개가 불타고 있다. <臨絶時>는 다음과 같다.
오십년을 걸려서 죽을 마음 정했지만
어려운 일 정작 당하니 생각이 많더이다.
맹세코 다시 나왔지만 회복하지 못하였나니
저승에 가서라도 칼을 버리지 않으리라.
五十年來辦死心 臨難已有區區心
盟師在出終難復 地下有餘冒劍心
이상에서 의병장이 남기고 간 우국시를 소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문집을 남기고 간 유인석, 최익현을 제외하곤, 거개가 시문집을 전하지 않고 있어, 그들이 죽음에 임하여 남기고 간 한두 수의 임절시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몇 편밖에 안되는 우국시이긴 하지만, 이들 시작에서 얻어볼 수 잇는 몇 가지 특징을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의병장들은 거개가 문학 수업을 專主로 한 문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 자체는 拙朴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임절시에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卽現實的인 思意가 그대로 표출되어 있어 言外의 言을 찾아볼 수 있는 한시학의 오묘를 느낄 수 없다.
둘째, 도학자 출신의 의병장들이 남기고 간 시편 속에는 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사고가 깊이 작용하고 있어 疏豁한 맛을 減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Ⅲ. 결론
지금까지 개화기 시조와 한시를 고찰해보았다. 개화기 시조는 시기적으로 1894년 이후 1910년 후반까지, 개화기의 격동하는 시대의지를 반영한 시조로서 전통시조와 현대 시조의 接脈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즉, 개화기 시조는 時調文學史의 흐름 속에서 볼 때 전통시조-개화시조-新시조-현대시조로의 계기적 선상에 위치하며, 개화기시조라는 독립된 명칭으로 규정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시대의식의 적극적인 수용·저항 시가로서 현실 참여 문학이라는 사회기능적 측면에서 개화기가사 못지 않게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개화기한시는 개화와 척사라는 두 주류의 시대의지가 갈등과 混淆를 거듭한 당시 격동기의 실상을 담고 있으며, 개화의지가 끝내 망국이라는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있을 때, 주체적인 민족적 역량을 동원하는 데 그 주도적 역할을 한 척외적인 시대의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당시 민족사의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인들과 의병장들이 남긴 우국한시는 개화기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동안 개화기 시가 연구에서 개화기가사에 밀려 소외되었던 개화기시조와 한시의 가치와 의미를 확실히 주지하여, 개화기시가 문학의 중요한 연구로 계속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4』, 지식산업사, 1997.
민병수, 『개화기의 우국문학』,신구문화사, 1974.
민병수, 『한국한문학』, 태학사, 1996.
박을수, 「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한국학논집),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1983.
배영선, 「개화기 시가의 史的 연구」,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1983.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지부복궐척화의소>로 1876년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 반대하는 거센 상소를 올렸으며, 세태가 어지러울수록 성현의 도리를 굳게 지켜 잘못을 척결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척사위정의 준엄한 논리를 천명했다.
이강년(李康秊, 1858-1908)은 을미서가 때 유인석, 이인영 등과 기의하였다가 정미의거에도 다시 참가, 호서 창의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운강선생창의록』에 전하는 자탄시 한 수와 임절시 한 수가 있다. 특히 임절시는 순국의 최후가 너무도 처절하게 새겨져 있으며, 최후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 장부의 기개가 불타고 있다. <臨絶時>는 다음과 같다.
오십년을 걸려서 죽을 마음 정했지만
어려운 일 정작 당하니 생각이 많더이다.
맹세코 다시 나왔지만 회복하지 못하였나니
저승에 가서라도 칼을 버리지 않으리라.
五十年來辦死心 臨難已有區區心
盟師在出終難復 地下有餘冒劍心
이상에서 의병장이 남기고 간 우국시를 소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문집을 남기고 간 유인석, 최익현을 제외하곤, 거개가 시문집을 전하지 않고 있어, 그들이 죽음에 임하여 남기고 간 한두 수의 임절시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몇 편밖에 안되는 우국시이긴 하지만, 이들 시작에서 얻어볼 수 잇는 몇 가지 특징을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의병장들은 거개가 문학 수업을 專主로 한 문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 자체는 拙朴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임절시에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卽現實的인 思意가 그대로 표출되어 있어 言外의 言을 찾아볼 수 있는 한시학의 오묘를 느낄 수 없다.
둘째, 도학자 출신의 의병장들이 남기고 간 시편 속에는 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사고가 깊이 작용하고 있어 疏豁한 맛을 減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Ⅲ. 결론
지금까지 개화기 시조와 한시를 고찰해보았다. 개화기 시조는 시기적으로 1894년 이후 1910년 후반까지, 개화기의 격동하는 시대의지를 반영한 시조로서 전통시조와 현대 시조의 接脈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즉, 개화기 시조는 時調文學史의 흐름 속에서 볼 때 전통시조-개화시조-新시조-현대시조로의 계기적 선상에 위치하며, 개화기시조라는 독립된 명칭으로 규정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시대의식의 적극적인 수용·저항 시가로서 현실 참여 문학이라는 사회기능적 측면에서 개화기가사 못지 않게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개화기한시는 개화와 척사라는 두 주류의 시대의지가 갈등과 混淆를 거듭한 당시 격동기의 실상을 담고 있으며, 개화의지가 끝내 망국이라는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있을 때, 주체적인 민족적 역량을 동원하는 데 그 주도적 역할을 한 척외적인 시대의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당시 민족사의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인들과 의병장들이 남긴 우국한시는 개화기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동안 개화기 시가 연구에서 개화기가사에 밀려 소외되었던 개화기시조와 한시의 가치와 의미를 확실히 주지하여, 개화기시가 문학의 중요한 연구로 계속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4』, 지식산업사, 1997.
민병수, 『개화기의 우국문학』,신구문화사, 1974.
민병수, 『한국한문학』, 태학사, 1996.
박을수, 「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한국학논집),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1983.
배영선, 「개화기 시가의 史的 연구」,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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