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과 김일성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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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헌영과 김일성에 관한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1. 문제의 제기
2. 연구의방법
3. 선행연구와 현 연구와의 차이
4. 현 연구의 제한점

Ⅱ. 본론
1. 박헌영은 누구인가?
2. 김일성은 누구인가?
3. 전쟁 중의 김일성과 박헌영
4. 전쟁 후의 김일성과 박헌영
5. 박헌영의 죽음의 의문점
6. 박헌영과 남로당의 숙청의 결과

III. 결론

본문내용

적 참여가 없었음을 입증한다. 이렇게 보면 박헌영은 어떤 강압과 속임수에 의하여 자신의 간첩활동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책임만을 인정한 것이었다. 권오직은 증인 신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박헌영에 대한 죄악을 열거하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박헌영이 간첩활동 했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권오직은 박헌영의 모든 죄악이 종파 사상에 지배되어 감행된 것이라고
) 최고재판소, 앞의 책, 76-77쪽.
진술할 뿐이다. 그것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박헌영의 간첩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 권오직이 후에 출당을 당한 것은 이러한 박헌영에 대한 소극적 증언 때문일 것이다.
한철, 김소목의 주장도 마찬가지이며 조일명의 주장에서 약간의 간첩활동에 대한 진술이 나오나 주관적 추론에 불과한 것이고 일련의 범죄활동들이 박 헌영이 모르게 진행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최고재판소, 81쪽.
라는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박헌영의 엄청난 논리적 비약을 통한 자신의 간첩활동 인정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진술에서는 그의 간첩활동의 구체적 증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6. 박헌영과 남로당의 숙청의 결과
남로당계열의 숙청은 커다란 정치적 충격을 불러 일으켰지만 실제로 그것은 김일성중심의 정권에 별다른 타격이나 분열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남북통일의 실패는 박헌영 세력에게는 그들의 기반인 남한지역의 영원한 상실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것에 저항할 세력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로당계열은 연안계나 소련계 한인출신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도 전혀 이끌어내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해외에서의 항일투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던 연안계는 만주 빨치산에 더 가까웠고 남로당계의 활동에 대해서 처음부터 비판적이었다. 소련계 한인파는 소련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김일성을 지지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허가이와 박헌영이 친분을 유지했다고 하나 그것은 남로당계와 소련계와의 연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승엽, 박헌영 사건은 북한정권에게 타격 전쟁 후 남한과 완전히 절연된 북한의 공간에서 박헌영, 이승엽등의 제거는 오히려 남한과의 통일 가능성이 생생히 살아 있었던 전쟁 전에 비하여 매우 쉬웠다. 남로당 출신의 하급당원들에게도 박헌영의 숙청은 별다른 동요를 수반하지 않았다. 공산당의 성격상 일단 공식화된 견해는 일체의 회의를 용납치 않는 진리였고 당원들은 그것을 철저히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었다. 남로당출신으로 전쟁 후 북한에서 평안북도 안주군 평률리 민주선전실장으로 일했던 김진계는 이승엽사건과는 "비교도 안되게" 박헌영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재빨리 받아들이고 박헌영과의 모든 연관을 부정함으로써 살아남는 것이었다.
) 김진계/김응교, 『조국』 (풀빛, 1993), 232-235쪽, 246-248쪽
을 입히기보다는 오히려 대내적인 단결과 외부 영향력의 차단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기하고 생산관계의 급진적 사회주의화를 토대로 한 고도성장을 밀고 나가는 정치 심리적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사건은 북한주민들과 당원들의 적극적 자발적 제안이나 행동을 억제시키고 김일성 정권에 대한 모든 비판 행위를 '이승엽, 박헌영도당' 반당반혁명 간첩행위와 연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위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김일성 일인중심의 지배 공산주의자 엘리트의 독주에 기여했다. 그것은 김일성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분명히 득이 되었으나 모든 토론을 흑백논리의 틀에 가두어놓음으로써 북한에서 매우 교조적인 사회주의체제가 형성되는데 기여했다.
국제적 파장으로는 소련이 박헌영에 가졌던 상당한 수준의 호의에 비추어 볼 때 김일성 정권이 박헌영의 제거에 일정한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이승엽 등의 재판 한 달 후인 53년 9월에는 김일성은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 및 동구를 방문하였다. 그것은 주로 경제적 원조를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아마도 이승엽 사건에 대해 소련의 이해를 구했을 것이다. 소련이 박헌영의 제거를 방조했거나 반대한 흔적은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러시아의 한국문제 전문가인 안드레리 란코프는 1953년 평양 재판이 1930년대의 모스크바 재판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였음을 지적하고 평양 재판에 대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남겨놓고 있다.
Ⅲ. 결론
앞에서 보았듯이 북한에서 주장하는 박헌영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주장은 많이 왜곡되고 다른 것 같다.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위해서 박헌영을 전쟁을 찬성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찬성하려고 한 부분도 있겠으나 남로당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던 주인공은 김일성이 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누가 이기고 진 것은 아니었지만 김일성이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김일성은 회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권력 유지와 전쟁 책임 회피의 모든 것을 박헌영에게 돌린 것이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미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 남한에 있는 민주 세력의 파괴, 북한 정부의 전복이라는 죄목이었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의 권력유지를 위한 피해자가 되었다. 김일성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눈을 다른 쪽으로 돌리게 하면서 북한을 재건시키기 위한 노력을 새롭게 전개하였고, 남로당 출신들에게 대응하고 각 계파들의 지도자들과 대결하면서, 전후복구 사업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김일성은 북한의 단 하나의 권력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한 피해자로 생각이 된다. 이러한 박헌영이 여전히 미제의 앞잡이로 불리워져야 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참고문헌>
박헌영 - 박갑동 저 인간사 1983년
한국전쟁과 노동당 전략 - 김정곤 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 서대숙 저 청계연구소 1989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ⅠⅡ - 박명림 저 나남출판 1996년
북한의 권력구조 형성과 유일체제의 확립 - 염복규(서울대 국사학과 석사졸)
분단 전후의 현대사 - 브로스 커밍스 일월서각 1983년
분단과 민족 - 손건호 지식산업사 1986년
남로당연구 - 김남식 돌베개 1984년
한국전쟁의 기원 -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주환 옮김 청사 1986년

키워드

박헌영,   김일성,   북한,   논문,   서대숙,   빨치산,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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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3.12.22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9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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