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Ⅱ. 미·소 군정의 실시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Ⅲ. 좌우 합작 운동
Ⅳ.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1945.12)
: 임시 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5년간 신탁 통치 결정
Ⅴ. 1·2차 미소공동위원회
Ⅵ. 5·10 남한 총선거 실시
Ⅶ. 4·3제주항쟁(1948)
Ⅷ. 여수·순천 10월 봉기(1948)
Ⅸ.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활동(반민특위)
Ⅹ.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1948.9.9)
: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구성(1946.2)
- 김일성 주도, 토지 개혁(무상몰수, 무상분배), 친일파 처단, 사회주의 개혁 추진
Ⅱ. 미·소 군정의 실시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Ⅲ. 좌우 합작 운동
Ⅳ.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1945.12)
: 임시 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5년간 신탁 통치 결정
Ⅴ. 1·2차 미소공동위원회
Ⅵ. 5·10 남한 총선거 실시
Ⅶ. 4·3제주항쟁(1948)
Ⅷ. 여수·순천 10월 봉기(1948)
Ⅸ.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활동(반민특위)
Ⅹ.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1948.9.9)
: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구성(1946.2)
- 김일성 주도, 토지 개혁(무상몰수, 무상분배), 친일파 처단, 사회주의 개혁 추진
본문내용
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법원장(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 김병로는 반민 특위활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은 계속 비협조로 일관하더니 2월 24일 반민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반민법 법률개정안 을 제2회 39차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결과는 부결되었으며, 특위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4. 역사적 평가
: 8·15광복 직후 무엇보다도 신속히 친일파를 척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초기에 기회를 놓쳤고, 이후 미군정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공산세력에 대항할 세력으로 친일파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 의 국익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통치구조를 부활시 키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어 등장한 이승만정권 역시 미군정의 통치구조를 그대 로 이어받았고, 친일파는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또 이를 위 하여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친일세력이 그 후에도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물론이고, 한국민족주의의 좌절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X.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1948.9.9)
1.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구성
: 북한지역은 소련군의 점령정책을 통해 공산화되었다. 우선 북한지역의 소비에트화는 각 도인민위원회(道人民委員會)를 조직하여 일제로부터 접수한 행정권을 인계 받아 행정의 공백을 메우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지역 점령군 사령관인 로마넨코 소장은 평양에 있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평남지부(대표 조만식)와 조선공산당 평남지부(대표 현준혁)를 통합하여‘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평안남도 인민 정치위원회」(’45. 8. 27)가 구성되었으며, 유사한 단체들이 북한의 나머지 4개 도에도 속속 조직되었다.
1945년 10월 8일 로마넨코는 북한 5개 도에 설치되었던 임시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였는데, 회의 결과 1945년 10월 28일「5도행정국」이 발족되었다. 5도행정국은 소 련군정 하에서 각급 인민위원회를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기구였다. 1945년 12월 17~18일 분국 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김일성 이 위원장이 되었다. 북한에서 소련점령군의 도움 아래 공산당이 결성됨에 따라 공산당 지배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그후 북조선공산당은 김두봉의 신민당과 합당(’46. 8)하면서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하였으며, 공산당 일당지배를 위한 내적 통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통치기구를 계획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8일“북조선 정당·사회단체 5도행정국 및 각도 인민위원회 확대 회의”를 개최하여「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는 5도행정국의 기능을 계승함으로써 북한에 공산당이 지도하는 단독 정권기관이 등장하 게 되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최고 집행권을 행사하는 동시에 임시법령을 제정하 고 공포할 권한을 함께 갖는 기관이었다. 소련점령군 당국은 김일성을 통치자로 만드는 작업과 함께, 1946년 11월에 북한의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토록 하고, 1 1947년 2월에는 읍·면·리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를 통해 도·시·군 인민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최고입법기관으로서 북조선 인민회의의 설치를 결의하고, 1947년 2월 21일 북조선 인민회의를 통해「북조선 인민위원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1948 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1948년 4월 29일 북조선 인민회의는 특 별회의를 통해「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 초안을 승인했다.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9월 2일부터 9월 10일까지 개 최된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에서 헌법을 채택(9. 8)한 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 는 내각을 승인함으로써 소련의 위성국이 한반도 북쪽에 탄생하게 되었다. 정권수립 이후 1949년 6월 24일 남로당과 북로당 제1차 전원합동회의를 개최하여 합당함으로써 북한의 「조선로동당」이 공식적으로 창당되었고,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선출되었다.
소련은 북한정권이 성립하기까지는 물론, 그 이후에도 계속 배후조종과 감독을 계속하 였다. 최근 러시아가 공개한 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1948년 1월 20일자로 스티코프 장군 에게 북조선 인민회의 의제와 회의 개최 허락을 요청한 사실과 당시 조·소간에 11개 협 정이 체결된 후 북한에서 시행되어져야 할 제반 조치들을 나열해 놓은 1949년 3월19일자 스티코프의 편지 등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2. 김일성의 권력 공고화와 유일체제의 형성
: 해방이후 북한에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세력, 현준혁·박헌영 등 국내 공산 주의세력,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을 한 김두봉 등 연안파(延安派), 소련군과 함께 들어온 허가이 중심의 소련파, 김일성 추종세력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였다. 조선 노동당은 김일성 중심의 북조선 공산당과 김두봉 중심의 조선신민당, 박헌영 중심의 남조 선노동당이 시차를 두고 합당하여 창당된 것이며, 여기에 소련파가 가세하였다. 김일성은 소련의 비호하에 테러와 통일전선전술 등 이중정책을 구사하며 정적(政敵)들을 제거해 나 갔다.
한편, 1967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당의 유일 사상 체계를 튼튼히 세우며 온 사회를 혁명화, 로동계급화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전개하기로 결정하 여 주체사상이 북한의 통치이데올로기로 확립됨으로써 김일성 유일 체제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 당시부터 김일성은 영도와 사상의 유일성을 확보하면서‘수령’이라고 불리우 기 시작하였다.
1970년 제5차 당대회 무렵 북한의 지도층은 김일성에 대한 충성파로 일색화되었으며, 이른 바‘유일영도체계’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 유일 체제는 1972년 12월 개정 된「사회주의헌법」을 통해 제도화되었다.
4. 역사적 평가
: 8·15광복 직후 무엇보다도 신속히 친일파를 척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초기에 기회를 놓쳤고, 이후 미군정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공산세력에 대항할 세력으로 친일파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 의 국익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통치구조를 부활시 키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어 등장한 이승만정권 역시 미군정의 통치구조를 그대 로 이어받았고, 친일파는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또 이를 위 하여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친일세력이 그 후에도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물론이고, 한국민족주의의 좌절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X.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1948.9.9)
1.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구성
: 북한지역은 소련군의 점령정책을 통해 공산화되었다. 우선 북한지역의 소비에트화는 각 도인민위원회(道人民委員會)를 조직하여 일제로부터 접수한 행정권을 인계 받아 행정의 공백을 메우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지역 점령군 사령관인 로마넨코 소장은 평양에 있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평남지부(대표 조만식)와 조선공산당 평남지부(대표 현준혁)를 통합하여‘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평안남도 인민 정치위원회」(’45. 8. 27)가 구성되었으며, 유사한 단체들이 북한의 나머지 4개 도에도 속속 조직되었다.
1945년 10월 8일 로마넨코는 북한 5개 도에 설치되었던 임시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였는데, 회의 결과 1945년 10월 28일「5도행정국」이 발족되었다. 5도행정국은 소 련군정 하에서 각급 인민위원회를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기구였다. 1945년 12월 17~18일 분국 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김일성 이 위원장이 되었다. 북한에서 소련점령군의 도움 아래 공산당이 결성됨에 따라 공산당 지배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그후 북조선공산당은 김두봉의 신민당과 합당(’46. 8)하면서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하였으며, 공산당 일당지배를 위한 내적 통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통치기구를 계획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8일“북조선 정당·사회단체 5도행정국 및 각도 인민위원회 확대 회의”를 개최하여「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는 5도행정국의 기능을 계승함으로써 북한에 공산당이 지도하는 단독 정권기관이 등장하 게 되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최고 집행권을 행사하는 동시에 임시법령을 제정하 고 공포할 권한을 함께 갖는 기관이었다. 소련점령군 당국은 김일성을 통치자로 만드는 작업과 함께, 1946년 11월에 북한의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토록 하고, 1 1947년 2월에는 읍·면·리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를 통해 도·시·군 인민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최고입법기관으로서 북조선 인민회의의 설치를 결의하고, 1947년 2월 21일 북조선 인민회의를 통해「북조선 인민위원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1948 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1948년 4월 29일 북조선 인민회의는 특 별회의를 통해「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 초안을 승인했다.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9월 2일부터 9월 10일까지 개 최된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에서 헌법을 채택(9. 8)한 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 는 내각을 승인함으로써 소련의 위성국이 한반도 북쪽에 탄생하게 되었다. 정권수립 이후 1949년 6월 24일 남로당과 북로당 제1차 전원합동회의를 개최하여 합당함으로써 북한의 「조선로동당」이 공식적으로 창당되었고,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선출되었다.
소련은 북한정권이 성립하기까지는 물론, 그 이후에도 계속 배후조종과 감독을 계속하 였다. 최근 러시아가 공개한 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1948년 1월 20일자로 스티코프 장군 에게 북조선 인민회의 의제와 회의 개최 허락을 요청한 사실과 당시 조·소간에 11개 협 정이 체결된 후 북한에서 시행되어져야 할 제반 조치들을 나열해 놓은 1949년 3월19일자 스티코프의 편지 등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2. 김일성의 권력 공고화와 유일체제의 형성
: 해방이후 북한에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세력, 현준혁·박헌영 등 국내 공산 주의세력,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을 한 김두봉 등 연안파(延安派), 소련군과 함께 들어온 허가이 중심의 소련파, 김일성 추종세력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였다. 조선 노동당은 김일성 중심의 북조선 공산당과 김두봉 중심의 조선신민당, 박헌영 중심의 남조 선노동당이 시차를 두고 합당하여 창당된 것이며, 여기에 소련파가 가세하였다. 김일성은 소련의 비호하에 테러와 통일전선전술 등 이중정책을 구사하며 정적(政敵)들을 제거해 나 갔다.
한편, 1967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당의 유일 사상 체계를 튼튼히 세우며 온 사회를 혁명화, 로동계급화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전개하기로 결정하 여 주체사상이 북한의 통치이데올로기로 확립됨으로써 김일성 유일 체제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 당시부터 김일성은 영도와 사상의 유일성을 확보하면서‘수령’이라고 불리우 기 시작하였다.
1970년 제5차 당대회 무렵 북한의 지도층은 김일성에 대한 충성파로 일색화되었으며, 이른 바‘유일영도체계’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 유일 체제는 1972년 12월 개정 된「사회주의헌법」을 통해 제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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