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부조리극에 대하여
(1) 부조리극의 배경
(2) 부조리극의 특징
2. 프랑스 작가들
(1) Eugene Ionesco
(2) Samuel Beckett
(3) Jean Gent
(4) Arthus Adamor
3. 미국 작가들
(1) Edward Albee
4. 영국작가들
(1) Harold Pinter
(2)Annold Wesker
5. Samuel Beckett의 Waiting for Dodot에 대하여
(1) 주제를 어떻게 연극화했는가
(2) 진리의 현장 부재와 부조리 인식
(3) 시간의 파괴력
(4) 비 아리스토텔레스적 소극 - 몸체의 연극
(5) 소격 효과
6. 우리 나라에서 공연한 부조리극 - 서울 연극 앙상블의 「코뿔소」
Ⅲ. 결론
Ⅱ. 본론
1. 부조리극에 대하여
(1) 부조리극의 배경
(2) 부조리극의 특징
2. 프랑스 작가들
(1) Eugene Ionesco
(2) Samuel Beckett
(3) Jean Gent
(4) Arthus Adamor
3. 미국 작가들
(1) Edward Albee
4. 영국작가들
(1) Harold Pinter
(2)Annold Wesker
5. Samuel Beckett의 Waiting for Dodot에 대하여
(1) 주제를 어떻게 연극화했는가
(2) 진리의 현장 부재와 부조리 인식
(3) 시간의 파괴력
(4) 비 아리스토텔레스적 소극 - 몸체의 연극
(5) 소격 효과
6. 우리 나라에서 공연한 부조리극 - 서울 연극 앙상블의 「코뿔소」
Ⅲ. 결론
본문내용
모습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등장인물의 반응만 가지고도 코뿔소의 위협적인 존재가 생생히 느껴 질 정도였다.
코뿔소가 한 마리였느냐, 두 마리였느냐, 아프리카 종이냐, 아시아 종이냐, 뿔이 하나였느냐, 두개였느냐에 대한 왈가왈부와 논리학자의 논리적인 추론은 카페에서 뿐 아니라 다음날 사무실에서까지 재현되면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불가능성, 상호 이해의 어려움 등이 제시된다. 삶의 비논리성, 우스꽝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전략은 반복, 상투어의 사용 등의 언어적 전략과, 고양이의 장례식 등에서 보여지는 사소한 현실의 과장이다. 논리학자와 문달오 두 인물의 역할을 맡았던 문영동의 연기는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나 친숙하게 볼 수 있는 이론가와 냉소주의자의 타입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이 극단의 「남자는 남자다」 공연에서 존재론적 변신을 겪는 갈리 가이역을 맡았던 김창용, 또한 천성은 착하지만 의지가 약한 배난제역을 맡아서 관객에게 친숙하고 공감이 가는 연기를 보여 주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전복되고 종말론적인 혼돈 상태로 변하여 우리에게 존재론적 회의를 던져주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이 공연에서는 언어뿐 아니라, 소품, 조명, 음향 등 비언어적 기호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코뿔소의 머리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전기 기타와 드럼으로 코뿔소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1막에서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기 기타와 드럼의 연주로 인해 코뿔소가 리드미컬하게 달리는 모습이 배우들의 반응과 제스처의 도움으로 표현되었다. 코뿔소의 소리를 악기를 통해 표현한 것은 작가 자신의 대본에서 그 소리가 후반으로 갈수록 '음악적이고 아름답게' 들려야 한다고 주문한 것과 맞아떨어졌다.
이 공연에 가장 충격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는 3막에서 뒷벽이 대경 실색할 만한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지든 장면이었다. 기다란 판자를 철사로 엮어 만든 뒷벽은 그때까지 뒷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가 급작스럽게 무너지면서 배난제를 지탱하고 있는 존재의 끈이 끊어진 듯한 충격을 전달해주었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연극에서 필요한 것이 "모든 것을 발작의 경지에까지 몰아가며, 비극의 근원이 있는 지점까지 몰아가는 것, 폭력의 연극-난폭하게 희극적이며, 난폭하게 극적인-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연결된다. 이것은 연극에서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한 충격의 필요성을 주장한 아르또의 잔혹극의 기법도 연상하게 하였다.
조명 또한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 가면서 말세적인 혼돈 상태로 변하여 가는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장이 코뿔소로 변신하는 장면에서는 낮은 각도에서 비치는 각광이 장의 모습을 실제보다 더 크게 뒷벽에 비치도록 만들어서 작은 몸집의 장이 코뿔소로 변신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는 장의 벗은 몸에 물을 끼얹은 상태에서 초록색 조명을 비추어 후피동물의 피부 같은 인상을 주는데 성공하였다.
이 공연에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코뿔소의 소리를 통한 관객의 상상력에만 의존하여 2막과 3막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코뿔소로 변해가며 주는 위협을 실감나게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2막에서 사무실의 계단이 무너지고 사무실이 먼지로 뒤덮이고 그 사이로 코뿔소의 머리가 보인다던가, 3막에서 배난제의 창문 바깥을 코뿔소들이 가득 매우는 등의 장면을 통해 일상이 혼돈으로 바뀌는 모습이 표현되지 못했다. 이것은 기술적인 어려움에도 기인하겠지만, 공연장소인 바탕골소극장의 아리나(arena) 타입의 무대에서는 연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어려움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이오네스코의 다른 작품에서-「아메데」에서는 시체가, 「새로운 임차인」에서는 가구가, 「의자」에서는 의자들이-사물들이 무대를 가득 채워 존재의 공허를 위협하며 불어나듯이, 「코뿔소」에서도 코뿔소들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여 배난제가 살고 있는 마지막 공간을 위협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Ⅲ. 결론
지금까지 부조리극과 그 작가, 대표작들을 살펴보았다. 부조리극은 1950년대에 시작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공감할 수 있다. 부조리극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무엇을 점검할 수 있는가? 점점 단절되어 가는 인간 언어의 부재, 인간은 기계(컴퓨터)보다 못한 존재라는 인식, 불안감에 사로잡혀 가치 없는 것의 집착 등을 우리는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이 부조리극이 성행했던 1950년대의 시대상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부조리는 느끼며 살아간다. 어떤 작품들은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부조리를 그리고 있지만, 이런 작품들로 인해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삶을 다시 반성하게끔 만든다. 부조리극이 제 2차 대전 이후에 실존주의 철학 사상 등과 혼합되어 나왔다면, 지금은 기계화 되어가고 있는 세계에서 점점 인간적인 것이 사라져 가는 상태에 있는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부조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부조리 작가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부조리를 작품에 담았다. 우리는 그들의 부조리를 각각 다른 느낌으로 부조리를 맞이할 수 있다.
부조리극은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 공연되고 있는 장르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렇게 많은 부조리극이 우리 연극계에 있었다. 부조리극이 웃음을 준다면, 블랙 코메디적인 쓴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말한다. 또한 부조리극이 울음을 준다면, 절대진리가 없는 상황에서 결론 지을 수도 없고, 결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결론에서일 것이다.
어떤 문학작품이든지 인간에 관한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포괄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존재할 때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는 신을 중심으로 한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반박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인간의 관점에서 신을 그리고 있고, 인간의 관심사인 신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중세 시대 또한 인간에 관한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기를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공감과 앎의 즐거움 또한 충족될 때 '고전'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극 또한 시대는 다르지만, 인간의 정의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감할 만하다.
코뿔소가 한 마리였느냐, 두 마리였느냐, 아프리카 종이냐, 아시아 종이냐, 뿔이 하나였느냐, 두개였느냐에 대한 왈가왈부와 논리학자의 논리적인 추론은 카페에서 뿐 아니라 다음날 사무실에서까지 재현되면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불가능성, 상호 이해의 어려움 등이 제시된다. 삶의 비논리성, 우스꽝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전략은 반복, 상투어의 사용 등의 언어적 전략과, 고양이의 장례식 등에서 보여지는 사소한 현실의 과장이다. 논리학자와 문달오 두 인물의 역할을 맡았던 문영동의 연기는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나 친숙하게 볼 수 있는 이론가와 냉소주의자의 타입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이 극단의 「남자는 남자다」 공연에서 존재론적 변신을 겪는 갈리 가이역을 맡았던 김창용, 또한 천성은 착하지만 의지가 약한 배난제역을 맡아서 관객에게 친숙하고 공감이 가는 연기를 보여 주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전복되고 종말론적인 혼돈 상태로 변하여 우리에게 존재론적 회의를 던져주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이 공연에서는 언어뿐 아니라, 소품, 조명, 음향 등 비언어적 기호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코뿔소의 머리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전기 기타와 드럼으로 코뿔소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1막에서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기 기타와 드럼의 연주로 인해 코뿔소가 리드미컬하게 달리는 모습이 배우들의 반응과 제스처의 도움으로 표현되었다. 코뿔소의 소리를 악기를 통해 표현한 것은 작가 자신의 대본에서 그 소리가 후반으로 갈수록 '음악적이고 아름답게' 들려야 한다고 주문한 것과 맞아떨어졌다.
이 공연에 가장 충격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는 3막에서 뒷벽이 대경 실색할 만한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지든 장면이었다. 기다란 판자를 철사로 엮어 만든 뒷벽은 그때까지 뒷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가 급작스럽게 무너지면서 배난제를 지탱하고 있는 존재의 끈이 끊어진 듯한 충격을 전달해주었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연극에서 필요한 것이 "모든 것을 발작의 경지에까지 몰아가며, 비극의 근원이 있는 지점까지 몰아가는 것, 폭력의 연극-난폭하게 희극적이며, 난폭하게 극적인-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연결된다. 이것은 연극에서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한 충격의 필요성을 주장한 아르또의 잔혹극의 기법도 연상하게 하였다.
조명 또한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 가면서 말세적인 혼돈 상태로 변하여 가는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장이 코뿔소로 변신하는 장면에서는 낮은 각도에서 비치는 각광이 장의 모습을 실제보다 더 크게 뒷벽에 비치도록 만들어서 작은 몸집의 장이 코뿔소로 변신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는 장의 벗은 몸에 물을 끼얹은 상태에서 초록색 조명을 비추어 후피동물의 피부 같은 인상을 주는데 성공하였다.
이 공연에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코뿔소의 소리를 통한 관객의 상상력에만 의존하여 2막과 3막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코뿔소로 변해가며 주는 위협을 실감나게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2막에서 사무실의 계단이 무너지고 사무실이 먼지로 뒤덮이고 그 사이로 코뿔소의 머리가 보인다던가, 3막에서 배난제의 창문 바깥을 코뿔소들이 가득 매우는 등의 장면을 통해 일상이 혼돈으로 바뀌는 모습이 표현되지 못했다. 이것은 기술적인 어려움에도 기인하겠지만, 공연장소인 바탕골소극장의 아리나(arena) 타입의 무대에서는 연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어려움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이오네스코의 다른 작품에서-「아메데」에서는 시체가, 「새로운 임차인」에서는 가구가, 「의자」에서는 의자들이-사물들이 무대를 가득 채워 존재의 공허를 위협하며 불어나듯이, 「코뿔소」에서도 코뿔소들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여 배난제가 살고 있는 마지막 공간을 위협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Ⅲ. 결론
지금까지 부조리극과 그 작가, 대표작들을 살펴보았다. 부조리극은 1950년대에 시작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공감할 수 있다. 부조리극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무엇을 점검할 수 있는가? 점점 단절되어 가는 인간 언어의 부재, 인간은 기계(컴퓨터)보다 못한 존재라는 인식, 불안감에 사로잡혀 가치 없는 것의 집착 등을 우리는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이 부조리극이 성행했던 1950년대의 시대상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부조리는 느끼며 살아간다. 어떤 작품들은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부조리를 그리고 있지만, 이런 작품들로 인해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삶을 다시 반성하게끔 만든다. 부조리극이 제 2차 대전 이후에 실존주의 철학 사상 등과 혼합되어 나왔다면, 지금은 기계화 되어가고 있는 세계에서 점점 인간적인 것이 사라져 가는 상태에 있는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부조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부조리 작가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부조리를 작품에 담았다. 우리는 그들의 부조리를 각각 다른 느낌으로 부조리를 맞이할 수 있다.
부조리극은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 공연되고 있는 장르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렇게 많은 부조리극이 우리 연극계에 있었다. 부조리극이 웃음을 준다면, 블랙 코메디적인 쓴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말한다. 또한 부조리극이 울음을 준다면, 절대진리가 없는 상황에서 결론 지을 수도 없고, 결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결론에서일 것이다.
어떤 문학작품이든지 인간에 관한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포괄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존재할 때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는 신을 중심으로 한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반박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인간의 관점에서 신을 그리고 있고, 인간의 관심사인 신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중세 시대 또한 인간에 관한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기를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공감과 앎의 즐거움 또한 충족될 때 '고전'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극 또한 시대는 다르지만, 인간의 정의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감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