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으로 살펴본 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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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수레를 타고 온 천녀가 집 안으로 들어서고, 병석을 털고 일어난 천녀가 마당에서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하나로 합쳐졌다. 장감은 사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떠난 뒤로 어찐 일인지 딸아이가 일체 말도 않고 흡사 술 취한 사람처럼 기력이 다 빠져 지냈는데, 이는 아마도 혼백이 떠나 버렸기 때문이었던가 보이." 천녀가 말했다. "서방님이 한을 품고 떠나는 것을 차마 견디지 못하고 혼이 그이를 따라 배에 올랐던 듯 합니다."
) 한형조,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여시아문, 2002, 255~257쪽에서 전문 발췌
모티프를 제외하고 생각하면 이 화두(話頭)는 아주 단순하게 사람의 몸(身)이 진짜 그 사람인가, 혼(魂)이 진짜 그 사람인가를 묻는다. 유물론자들은 아마 몸이 진짜라고 대답할 것이고, 유심론자들은 혼이 진짜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천녀( 女)의 몸과 혼이 동시에 아팠다는 얘기에다가 화두 말미의 송(頌)에서 "달은 하나인데 비치는 모습은 둘"이라는 말을 더해 생각하면, 역시 그 둘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비슷한 논리 구조를 가진 화두(話頭)중에 '검은 돌'이라는 것이 있다. '검다'는 개념과 '돌'이라는 사물은 각각 다른 두개의 성질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하나로 합쳐진 '검은 돌'일 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검은 돌'이라고 부를 때 이미 '검다'와 '돌'은 합쳐진 대상, 곧 각각 별개임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日面佛月面佛' 하고 외치는 화두(話頭)도 똑같은 얘기를 담고 있다고 판단된다.
선(禪)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연기(緣起), 즉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가슴 절절하게 느끼는 일이다. 천녀의 몸과 혼이 둘이면서 둘이 아니듯, 검은 돌의 검은 색과 돌이라는 성질이 둘이면서 둘이 아니듯, 해와 달이 둘이면서 둘이 아니듯, 너와 나도 둘이지만 둘이 아니다. 선(禪)에서 분별지(分別智)를 발동시켜서 나(我)와 내가 아닌 것(非我) 사이에 경계선을 긋지 말아야 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듯 하다. 그래서 모든 화두(話頭)는 이와 같은 사실을 깨우치게 하고자 역설과 반어, 왜곡, 과장, 비논리를 동원하는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 공안을 통해서 간화선(看話禪)의 성립과 전개 과정을 대략 살펴보았다. 아울러 간화선(看話禪)이 공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짚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선(禪)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그 인프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접하는 공안이란 뜬구름 잡는 얘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가 일상적인 논리적 사고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을 갈구하는 사람, 혹은 삶의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여서 백척간두에 서서 한 발자국을 내딛을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공안이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0세기 후반에 전 세계는 테크노피아가 제시하는 청사진에 열광한 적이 있다. 과학이 발달하고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우리의 삶도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로 널리 퍼졌었다. 지금도 일련의 과학자들은 그 믿음의 끝자락을 붙잡고 연구실에서 매일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하지만 우리는 테크노피아의 약속이 지독한 거짓말임을 매 순간 확인하게 된다. 고도로 발달한 통신 기술을 빌려 실시간으로 이라크 전쟁의 참상을 보도하는 뉴스를 볼 때면, 과학이 인간의 행복을 담보하기 보다는 살인 기술만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일찍이 인간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두 가지 수단을 발명한 바 있다. 구원과 초월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은 이분법적 세계관과 수직적 절대 위계 구조를 바탕으로,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인 신(神)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한계에 좌절할 때마다 절대자에게 기대 구원받기를 열망했다. 하지만 절대자의 상정은 인간의 차원과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 사이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더 큰 절망의 함정을 파놓는 결과를 낳았다. 그 구조 아래에서 우리 인간은 신(神)의 뜻을 이해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다. 단순히 그분의 의지에 따라 종말로 치닫는 철로 위에서 한 숨 짓는 것만 허락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신 앞에 홀로 선 인간'이 만들어낸 광기(狂氣)의 전쟁을 보며 우리는 참담한 심정에 무기력감과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방법은 닫힌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해탈(解脫)이라고 부른다. 부처는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에 의해 구원받기를 바라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어 안팎을 두루 살필 것을 종용한다.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번뇌(煩惱)와 해탈(解脫)이 둘이 아니며, 인간 누구나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本來面目)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만 온갖 집착의 먼지로 덮여 어두워진 불성(佛性)을 되찾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역설한다. 좌선(坐禪)이라고 부르던 참선(參禪)이라고 부르던, 혹은 결가부좌(結跏趺坐)라고 하던, 방편을 가리키는 명칭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신체의 모든 활동을 극도로 느리게 만듦으로써 자기 안에 깊이 숨겨져 있는 '나'를 찾는 행위의 본질은 명상(meditation)이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의 최신 경향이 동양 철학, 특히 일본이 서양에 수출한 것 중에서 최고의 명품인 Zen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 속에서 그들은 행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회귀할 수밖에 없는 지점인 마음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행복해지는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볼 일이다.
참고문헌
한형조,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여시아문, 2002
박재현, 「깨달음의 신회」푸른역사, 2002
성철, 「돈황본 육조단경」, 장경각, 1993
김태완,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 장경각, 2001
김용옥, 「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통나무
경전연구모임, 「유마힐 소설경」, 불교시대사, 1993
오강남, 「장자」, 현암사, 2002
오강남, 「도덕경」, 현암사, 2002

키워드

불교,   종교,   윤회,   ,   석가모니,   문학,   ,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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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4.05.04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8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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