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기에 몇 가지 변형을 주었다. 귀를 잘라내는 이형(귀이변에 칼도 刑)을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월형(달월변에 칼도 刑)으로 강화하고, 대신 ‘상형’(象刑)이라는 제도를 새로 만들었다. 상형은 월형이나 궁형과 같은 신체형을 직접 시행하지 않고, 형벌을 가하는 시늉만 하는 제도이다. 형벌을 받는 이는 실제 집행을 당하지는 않지만, 국가로부터 가부장적 통제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신체가 잘려나가는 공포를 수치심으로 대치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신체에 직접 가하는 규율을 수치심을 통한 자기규제로 바꾸려 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일보한 법 제도라 할 수 있다.
이 두 옛 이야기는 고대 중국에서 법과 형벌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설화다. 이 이야기를 문자로 정착시킨 이들이 모두 화하 겨레의 후손들인 까닭에, 기록은 치우와 묘족 등 동쪽 오랑캐에 관해 우호적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모든 형이상학은 승자의 사유다. 승자인 황제와 순임금쪽의 기록이지만, 거기에는 승자의 논리로 완전히 덮어버릴 수 없었던 사태의 진실이 묻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법과 형벌이라는 ‘흉악한 물건’은 치우와 묘족이 만들었다. 화하 겨레는 다만 이를 빌려와 ‘좋은 방향으로’ 개선해 사용했을 뿐이다. 고대 중국에서 형벌과 법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이처럼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다. 법치보다 예치를 앞세웠던 유가적 설화 조직자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이 설화를 통해, 화하 겨레는 형벌에 기댄 통치라는 ‘비인간적 발상’의 기원을 동쪽 오랑캐의 야만성에 돌리고, 자신들은 예치의 인문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며 빌라도처럼 손을 씻는다. 황제가 치우의 용맹한/흉악한 얼굴을 통치에 써먹은 것 또한 예수를 처형한 로마가 300년 뒤 예수교를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행위와 다를 게 없다.
앞에서 한번 인용한 바 있지만, 황제는 눈이 넷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공자는 합리적인 해석을 가한다. 실제 눈이 넷이 아니라 네 사람을 각지에 보내 대신 보고 듣고 채취한 정보를 보고하도록 한 것이라고. 황제에 대한 공자의 해석은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치우에 대해서도 괴물로 각색할 게 아니라 똑같이 합리적인 해석을 가해야 한다. 치우는 청동기로 치장한 괴물로 묘사되지만, 이는 뒤집어보자면 청동기문화를 선진적으로 도입한 천재적 지도자일 수 있다. 황제가 치우의 얼굴을 통치에 이용했다는 건 그만큼 치우의 카리스마가 강력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황제가 영웅이라면 치우 또한 영웅이다. 치우가 괴물이라면 황제 또한 괴물이다.
영원한 주변부가 오랑케의 운명일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설화를 다시 읽으며 ‘오랑캐의 운명’ 같은 걸 어렴풋하게 느낀다. 그들은 늘 중원의 중원됨을 위해 들러리를 서야 하는 존재다. 치우의 예에서처럼, 그들의 용맹스러움은 중원의 주인을 위해 ‘사나움’으로 윤색되고, 중원의 주인에게 봉사하는 한 다시 길들여진 ‘용맹’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들의 새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은 중원을 자극하는 ‘신의 채찍’일 뿐이다.
얼마 전 둔황에 다녀온 이의 기행문이 작은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둔황의 막고굴에서 “통일신라의 화랑이 그려진 벽화를 봤다”는 잠꼬대 같은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즉흥적 발상에 대해 여기서 논할 지면은 없다.(<한겨레> 2001년 7월14일치 21면 머릿기사 참조) 다만 ‘오랑캐’에 관한 사유의 반면교사로 삼기에 좋은 자료일 뿐이다. 둔황의 막고굴 벽화에는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인 ‘조우관’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조우관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모자 양식이다. 나중엔 신라에서도 조우관을 쓰기도 했다. 이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삼한에서 온 오랑캐임은 틀림없다. 이를 두고 삼국시기 사람들이 멀리 둔황까지 사신으로 가 활동했다며 자부심을 느끼는 건 참으로 딱한 일이다. 다른 벽화나 그림에서도 조우관의 인물은 늘 사방에서 온 사신들과 함께 등장한다. 동서남북의 오랑캐들인 이들은 중원에서 벌어진 설법을 듣거나 의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이들이다. 오랑캐를 필요로 하는 건 사실은 늘 중원이다. 조우관을 쓴 이가 거기 그려진 까닭은 중원의 세계관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지, 삼국시기의 사람들이 그곳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중원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중원의 사유는 중심의 사유다. 중심주의는 흔히 주변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일쑤다. 그것은 하나의 태양 아래 우주를 질서지우는 행위일 수 있다. 태양이 빛나는 동안 우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에 대해 자행하는 태양의 폭력이다. 땅거미가 지고 태양이 산 너머로 가려지면 어둠과 함께 우리 눈앞에 더디게 우주가 드러난다. 크고 작은 수많은 별(태양)들이 떠 있는 황홀한 풍경이 우주의 본디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의 태양이 머리 위에 떠올라 강렬하게 비칠 때, 우주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태양 아래서 우주에 대한 사유를 멈춘다. 중심의 사유는 태양빛 아래 드러난 질서를 우주의 질서라고 강변하는 사유다.
어떤 진리에 대한 맹신은 다른 많은 진리를 깨닫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것은 태양이 우주를 가리는 일과 같다. 작은 믿음은 큰 깨달음에 장애가 될 뿐이다. 하나를 믿을 때 우리는 다른 진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거기 머문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확신일 경우가 많다.
오랑캐의 사유로 중원을 괴롭히마
중원의 사유를 그치고 오랑캐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오히려 새로운 지평이 열림을 본다. 상상력은 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힘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다. 그러나 중원의 사유에서 상상력은 늘 테두리 안에 갇힌다. 우리가 이미 얻은 것은 늘 우리를 제약하는 감옥이다. 이론은 사상의 무덤이며 사상은 사유의 감옥이다.
오랑캐의 관점에 서서 사유한다는 것은 역사를 자기 중심으로 조직하는 일을 포기하는 걸 뜻하며, 자기중심적인 사유로 형이상학을 만들어내는 일을 포기하는 걸 뜻한다. 이 연재는 이제 여기서 마치지만,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중원의 사유를 오랑캐의 사유로 괴롭히는 일이 어디에서든 이어지길 바란다. 지금까지 함께해준 독자들께 고마움과 경의를 전한다.
이 두 옛 이야기는 고대 중국에서 법과 형벌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설화다. 이 이야기를 문자로 정착시킨 이들이 모두 화하 겨레의 후손들인 까닭에, 기록은 치우와 묘족 등 동쪽 오랑캐에 관해 우호적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모든 형이상학은 승자의 사유다. 승자인 황제와 순임금쪽의 기록이지만, 거기에는 승자의 논리로 완전히 덮어버릴 수 없었던 사태의 진실이 묻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법과 형벌이라는 ‘흉악한 물건’은 치우와 묘족이 만들었다. 화하 겨레는 다만 이를 빌려와 ‘좋은 방향으로’ 개선해 사용했을 뿐이다. 고대 중국에서 형벌과 법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이처럼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다. 법치보다 예치를 앞세웠던 유가적 설화 조직자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이 설화를 통해, 화하 겨레는 형벌에 기댄 통치라는 ‘비인간적 발상’의 기원을 동쪽 오랑캐의 야만성에 돌리고, 자신들은 예치의 인문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며 빌라도처럼 손을 씻는다. 황제가 치우의 용맹한/흉악한 얼굴을 통치에 써먹은 것 또한 예수를 처형한 로마가 300년 뒤 예수교를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행위와 다를 게 없다.
앞에서 한번 인용한 바 있지만, 황제는 눈이 넷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공자는 합리적인 해석을 가한다. 실제 눈이 넷이 아니라 네 사람을 각지에 보내 대신 보고 듣고 채취한 정보를 보고하도록 한 것이라고. 황제에 대한 공자의 해석은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치우에 대해서도 괴물로 각색할 게 아니라 똑같이 합리적인 해석을 가해야 한다. 치우는 청동기로 치장한 괴물로 묘사되지만, 이는 뒤집어보자면 청동기문화를 선진적으로 도입한 천재적 지도자일 수 있다. 황제가 치우의 얼굴을 통치에 이용했다는 건 그만큼 치우의 카리스마가 강력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황제가 영웅이라면 치우 또한 영웅이다. 치우가 괴물이라면 황제 또한 괴물이다.
영원한 주변부가 오랑케의 운명일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설화를 다시 읽으며 ‘오랑캐의 운명’ 같은 걸 어렴풋하게 느낀다. 그들은 늘 중원의 중원됨을 위해 들러리를 서야 하는 존재다. 치우의 예에서처럼, 그들의 용맹스러움은 중원의 주인을 위해 ‘사나움’으로 윤색되고, 중원의 주인에게 봉사하는 한 다시 길들여진 ‘용맹’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들의 새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은 중원을 자극하는 ‘신의 채찍’일 뿐이다.
얼마 전 둔황에 다녀온 이의 기행문이 작은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둔황의 막고굴에서 “통일신라의 화랑이 그려진 벽화를 봤다”는 잠꼬대 같은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즉흥적 발상에 대해 여기서 논할 지면은 없다.(<한겨레> 2001년 7월14일치 21면 머릿기사 참조) 다만 ‘오랑캐’에 관한 사유의 반면교사로 삼기에 좋은 자료일 뿐이다. 둔황의 막고굴 벽화에는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인 ‘조우관’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조우관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모자 양식이다. 나중엔 신라에서도 조우관을 쓰기도 했다. 이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삼한에서 온 오랑캐임은 틀림없다. 이를 두고 삼국시기 사람들이 멀리 둔황까지 사신으로 가 활동했다며 자부심을 느끼는 건 참으로 딱한 일이다. 다른 벽화나 그림에서도 조우관의 인물은 늘 사방에서 온 사신들과 함께 등장한다. 동서남북의 오랑캐들인 이들은 중원에서 벌어진 설법을 듣거나 의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이들이다. 오랑캐를 필요로 하는 건 사실은 늘 중원이다. 조우관을 쓴 이가 거기 그려진 까닭은 중원의 세계관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지, 삼국시기의 사람들이 그곳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중원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중원의 사유는 중심의 사유다. 중심주의는 흔히 주변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일쑤다. 그것은 하나의 태양 아래 우주를 질서지우는 행위일 수 있다. 태양이 빛나는 동안 우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에 대해 자행하는 태양의 폭력이다. 땅거미가 지고 태양이 산 너머로 가려지면 어둠과 함께 우리 눈앞에 더디게 우주가 드러난다. 크고 작은 수많은 별(태양)들이 떠 있는 황홀한 풍경이 우주의 본디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의 태양이 머리 위에 떠올라 강렬하게 비칠 때, 우주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태양 아래서 우주에 대한 사유를 멈춘다. 중심의 사유는 태양빛 아래 드러난 질서를 우주의 질서라고 강변하는 사유다.
어떤 진리에 대한 맹신은 다른 많은 진리를 깨닫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것은 태양이 우주를 가리는 일과 같다. 작은 믿음은 큰 깨달음에 장애가 될 뿐이다. 하나를 믿을 때 우리는 다른 진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거기 머문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확신일 경우가 많다.
오랑캐의 사유로 중원을 괴롭히마
중원의 사유를 그치고 오랑캐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오히려 새로운 지평이 열림을 본다. 상상력은 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힘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다. 그러나 중원의 사유에서 상상력은 늘 테두리 안에 갇힌다. 우리가 이미 얻은 것은 늘 우리를 제약하는 감옥이다. 이론은 사상의 무덤이며 사상은 사유의 감옥이다.
오랑캐의 관점에 서서 사유한다는 것은 역사를 자기 중심으로 조직하는 일을 포기하는 걸 뜻하며, 자기중심적인 사유로 형이상학을 만들어내는 일을 포기하는 걸 뜻한다. 이 연재는 이제 여기서 마치지만,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중원의 사유를 오랑캐의 사유로 괴롭히는 일이 어디에서든 이어지길 바란다. 지금까지 함께해준 독자들께 고마움과 경의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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