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언
2. 본 문
1) 반계 유형원의 생애
2) 이기관의 전회 : '실리론'의 성립
3)『반계수록』의 이념과 국가개혁론
3. 결 어
2. 본 문
1) 반계 유형원의 생애
2) 이기관의 전회 : '실리론'의 성립
3)『반계수록』의 이념과 국가개혁론
3. 결 어
본문내용
새로운 경지를 개척함이었다. 國家 公共性의 전면적 확대, 국가 경영에서의 계량성과 합리성의 중시, 신분 · 직역 상호간의 均等性 강화 등은 그 앞선 성취의 핵심이었다. 노비제 폐지론과 연관해서는 사회 全구성원을 國民으로 확대하여 포괄하는 측면이 있었다.
3. 結語
이상으로 磻溪 柳馨遠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의 國家改革論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實學의 鼻祖로 불리우는 유형원의 사상은 주자학을 배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도를 밝히기에 급급하였던 程朱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종래의 공리공담에 흐르기 쉬운 도덕 위주의 학풍으로부터 당면한 현실 문제로 학문적 관심을 전환시킨 것이라 하겠다.
유형원의 이러한 實理論에 입각하여 쓰여진 『磻溪隨錄』은 국가체제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개혁을 구상한 것으로서, 이는 15세기에 일단 완성된 체제로 복구하여 흐트러진 것을 재정비하자는 案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에 일대 수술을 가하여 17세기 이후에 '維新의 治'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법치론은 조선사회에서의 중세 극복의 논리와 원동력을 밝히는 데 중요한 하나의 구심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유형원에 의하여 기초 지어진 사회, 정치, 경제 등 현실적 제도에 대한 비판과 '改革'사상은 그것이 비록 봉건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데로 돌려지지 못하였다 하여도 현실은 반드시 改變되어야 한다는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그 후 양식 있는 식자들을 추동하였다. 그의 개혁사상은 무엇보다도 '실학'의 학풍을 선도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특히 星湖學派의 經世致用論을 비롯하여, 홍대용 등 북학파 학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형원 이전에 實學의 萌芽
16世紀 中葉에서 17世紀 中葉에 이르는 동안 이제까지와 같이 抽象的이고 思辨的이 아닌 現實的인 問題에 보다 더 깊은 關心을 갖고 그 解決에 努力하는 「務實」의 氣風이 있었다. 이와 같은 氣風은 일부 官僚들 사이에도 强調되었고, 때마침 刺戟的인 西洋文物에 접하자 그것이 好奇心의 對象이 되었으며, 그 밖에 陽明學이 潛行的으로 發芽하고 百科辭典派가 싹을 트기 시작하였다. 韓百謙, 李 光, 李元翼, 金堉, 權文海 같은 이들이 그 때의 人物이었다. -李乙浩, 『實學論叢』, 全南大學校出版部 , 1983, pp 359
가 없지 않았고, 유형원 이후에 實學이 크게 發展치 않은 것이 아니나 그가 實學을 學으로서 定立시켰다는 데 實學의 先驅者 磻溪 柳馨遠은 韓國 實學思想史上에서 그 자리를 크게 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유형원에 의해 본격되어진 실학적 사유를 통해, 조선사회가 새로운 일대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 여러 사상들을 풍부하게 구상할 수 있는 장을 열을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두에 유형원의 國家改革論이 당당히 서 있는 것에서 그의 勞作, 『磻溪隨錄』의 의의를 찾고 싶다.
♣ 참고문헌
- 金駿錫,「柳馨遠의 變法觀과 實理論」, 『東方學志』75, 1992
- 韓國史硏究會, <韓國實學의 새로운 摸索 -「《磻溪隨錄》의 理念과 法制 認識」: 정호 훈>, 景仁文化社, 2001
- 劉元東, <韓國實學槪論>, 정음문화사, 1984
- 韓國哲學史硏究會, <韓國實學思想史>, 도서출판 다운샘, 2000
- 정성철,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 한마당, 1988
- 강만길 · 이익성 外, <韓國의 實學思想>, 삼성출판사, 1990
- 李乙浩, <實學論叢>, 全南大學校出版部 , 1983
- 류종남, <實事求是의 횃불>, 도서출판 고글, 1999
- 歷史學會, <實學硏究入門>, 일조각, 1991
3. 結語
이상으로 磻溪 柳馨遠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의 國家改革論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實學의 鼻祖로 불리우는 유형원의 사상은 주자학을 배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도를 밝히기에 급급하였던 程朱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종래의 공리공담에 흐르기 쉬운 도덕 위주의 학풍으로부터 당면한 현실 문제로 학문적 관심을 전환시킨 것이라 하겠다.
유형원의 이러한 實理論에 입각하여 쓰여진 『磻溪隨錄』은 국가체제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개혁을 구상한 것으로서, 이는 15세기에 일단 완성된 체제로 복구하여 흐트러진 것을 재정비하자는 案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에 일대 수술을 가하여 17세기 이후에 '維新의 治'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법치론은 조선사회에서의 중세 극복의 논리와 원동력을 밝히는 데 중요한 하나의 구심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유형원에 의하여 기초 지어진 사회, 정치, 경제 등 현실적 제도에 대한 비판과 '改革'사상은 그것이 비록 봉건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데로 돌려지지 못하였다 하여도 현실은 반드시 改變되어야 한다는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그 후 양식 있는 식자들을 추동하였다. 그의 개혁사상은 무엇보다도 '실학'의 학풍을 선도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특히 星湖學派의 經世致用論을 비롯하여, 홍대용 등 북학파 학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형원 이전에 實學의 萌芽
16世紀 中葉에서 17世紀 中葉에 이르는 동안 이제까지와 같이 抽象的이고 思辨的이 아닌 現實的인 問題에 보다 더 깊은 關心을 갖고 그 解決에 努力하는 「務實」의 氣風이 있었다. 이와 같은 氣風은 일부 官僚들 사이에도 强調되었고, 때마침 刺戟的인 西洋文物에 접하자 그것이 好奇心의 對象이 되었으며, 그 밖에 陽明學이 潛行的으로 發芽하고 百科辭典派가 싹을 트기 시작하였다. 韓百謙, 李 光, 李元翼, 金堉, 權文海 같은 이들이 그 때의 人物이었다. -李乙浩, 『實學論叢』, 全南大學校出版部 , 1983, pp 359
가 없지 않았고, 유형원 이후에 實學이 크게 發展치 않은 것이 아니나 그가 實學을 學으로서 定立시켰다는 데 實學의 先驅者 磻溪 柳馨遠은 韓國 實學思想史上에서 그 자리를 크게 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유형원에 의해 본격되어진 실학적 사유를 통해, 조선사회가 새로운 일대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 여러 사상들을 풍부하게 구상할 수 있는 장을 열을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두에 유형원의 國家改革論이 당당히 서 있는 것에서 그의 勞作, 『磻溪隨錄』의 의의를 찾고 싶다.
♣ 참고문헌
- 金駿錫,「柳馨遠의 變法觀과 實理論」, 『東方學志』75, 1992
- 韓國史硏究會, <韓國實學의 새로운 摸索 -「《磻溪隨錄》의 理念과 法制 認識」: 정호 훈>, 景仁文化社, 2001
- 劉元東, <韓國實學槪論>, 정음문화사, 1984
- 韓國哲學史硏究會, <韓國實學思想史>, 도서출판 다운샘, 2000
- 정성철,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 한마당, 1988
- 강만길 · 이익성 外, <韓國의 實學思想>, 삼성출판사, 1990
- 李乙浩, <實學論叢>, 全南大學校出版部 , 1983
- 류종남, <實事求是의 횃불>, 도서출판 고글, 1999
- 歷史學會, <實學硏究入門>, 일조각,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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