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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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년전쟁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 왜, 백년전쟁이 중요한가

본론
1. 백년전쟁의 원인
2. 영국의 프랑스 침공
3. 아쟁쿠르 전투
4. 트로야 조약
5. 잔다르크의 등장
6. 잔다르크에 대한 역사적 평가

결론 - 백년전쟁의 마지막, 그 후 그리고 평가

본문내용

당한 고통을 치룸으로써, 민중의 의식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자로 승화되었다. 그녀는 신앙과 의지가 성취할 수 있는 기적의 가장 경의적인 실례였다.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 기린원, 1991, p.100
또한 근대 영국 사가들 역시 이 프랑스의 승리인 부빈 전투를 행운의 전투로 간주하고 지금까지도 모두가 잔 다르크를 칭송하며 그녀가 영국을 전제정치로부터 구출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영국왕은 파리에서 살고 프랑스 군대의 지지를 받으면서 프랑스에서 징수한 세금으로 부유하게 되어 영국국민을 다스리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녀 덕분에 영국 왕을 오랫동안 유혹해 오던 대륙제국의 위험한 꿈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이다. 장기간의 전쟁은 그 외에도 영속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두 나라의 국민이 각기 외국인과 접촉함으로써, 새롭게 강력한 국민의식이 탄생할 수 있었다. 영국인은 그들 나름대로 패전은 했지만, 공동으로 커다란 사업을 완수했다는 기억을 지니게 되었다.
앙드레 모로아, 『영국사』, 기린원, 1991, p192
그러나 그 이후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대표적 상징이 된 적이 없다. 같은 여성성이나 '마리안느'가 공화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도 잔 다르크는 그 시대의 상징이 되는 않는다. 그 이유는 프랑스인들이 실존 인물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존인물인 잔 다르크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집단 혹은 인물은 잔 다르크라는 이름의 영향력으로 독재자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이후, 프랑스인들은 또 다시 출현할 지도 모르는 독재자 · 절대군주에 민감하게 반응하혔던 것이다.
또한 잔 다르크의 기록은 역사적 사료로써 신빙성이 떨어진다. 잔 다르크의 재판 기록은 공정치 못하고, 잔 다르크가 수행한 전쟁의 모습들도 사실적이기 보다 신화적인 모습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부분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잔 다르크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헤르베르트 네테, 『잔 다르크』, 한길사, 1998, p. 8
9. 백년전쟁의 마지막, 그 후 그리고 평가
인구와 국력상 많은 군대를 파견할 수 없던 영국의 상황에서 잔다르트 이후 섭정공 베드포드는 줄어든 병력 8,000명을 가지고 어린 헨리 6세를 대신해서 샤를 7세와의 싸움을 이끌었다. 샤를 7세는 프랑스내의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심해지는 용병들의 횡포를 뿌리뽑기 위해 1445년조세를 확대하여, 상비군 기사 10,000명과 뷔로 형제가 이끄는 포병대를 신설했다. 상비군 제도의 출현과 더불어 백년전쟁 말기에 실용화된 대포의 출현은 전술의 변화와 함께 왕권강화 및 봉건기사들의 몰락을 촉진했다. 프랑스의 새로이 구성된 군대는 신속하게 노르망디를 재정복했다. 1450년 4월 15일, 포르미니 전투에서 포병대의 위력으로 영국군이 괴멸되었다. (2,000~3,000명 전사)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전에 종종 그러했던 것처럼 영국군에게 직접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전술을 바꿔 대포를 높은 곳에 설치하고 영국군에 맹포격을 가하여 그들을 무너뜨렸다. 화약이 중세 이래의 기사적인 전통을 완전히 파괴한 것이다.
배영수외,『서양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2000, p. 177
결국, 1453년 7월17일, 영국의 마지막 대장 톨벗은 휘하 기병들과 함께 프랑스군의 대포를 향해 무모한 돌진을 감행했다.
에릭 두르슈미트,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세종서적, 2001, p. 55
'크레시',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범했던 우를 이제는 영국군이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역사는 돌고 돈다라는 표현을 쓰나보다. 백년전쟁은 이 날 끝이 난다.
백년전쟁을 통하여 거의 4백년만에 자국의 영토를 완전히 차지하게 된 프랑스는 강화된 왕권과 더불어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샤를의 후계자인 루이1세가 정략적인 혼인으로 부르고뉴, 앙주, 프로방스, 가스코뉴등의 제후령을 흡수하여 절대왕정의 길을 열었다.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한 영국은 이제 정치적 관심을 브리튼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50여 대귀족 가문들이 왕위를 둘러싼 분쟁에 개입하여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시도했다. 1455년부터 1485년까지 30년동안 계속된 장미전쟁은 왕가와 대귀족들 사이에 전개된 내란이었다. 랭카스터 가와 요크 가 사이에 왕위를 두고 다툰 긴 내란동안 많은 귀족들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전쟁을 종결시키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헨리 7세가 영국의 절대왕정의 길을 열게 된다.
백년전쟁은 전쟁 무기와 전술적인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 전쟁이다. 이로써 중세적 막무가네식 돌격전쟁은 종말을 고하고, 전쟁의 모습이 전술로나 무기의 면에서, 보다 근대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한 더 이상 전쟁에서 기사계급이 필요성을 상실함에 따라, 기사계급은 사회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백년전쟁은 백년이라는 지리한 전쟁기간동안의 국가간 대치로써, 국민들은 스스로 적국에 대항하기 위해 자국의 단결성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전쟁을 통해 생겨난 이러한 감정은 양국이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중요한 요서가 되었다. 실제로 장기간의 국가전을 경험하지 못한 이탈리아나 동구유럽은 국민국가의 형성이 프랑스나 영국보다 늦게 나타난다. 이러한 점으로 이 후에 양국이 유럽에서 근대국가를 가장 먼저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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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 문 헌
버나드 로 몽고메리,『전쟁의 역사 I』, 책세상, 2000
다니엘 리비에르,『그림으로 보는 프랑스 역사』, 까치, 1995
앙드레 모로아,『영국사』, 기린원, 1991
앙드레 모로아,『프랑스사』, 기린원, 1991
에릭 두르슈미트,『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2001
배영수외,『서양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2000
로저 프라이스,『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개마고원, 2001
헤르네르트 네테, 『잔 다르크』. 한길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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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12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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