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는 말
1.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역사적 개념 이해
(1) 백년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2) 장미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2. 백년 전쟁과 장미전쟁의 연관성 고찰
(1) 백년 전쟁 후 프랑스와 비교지어 본 영국의 상황
(2) 장미전쟁은 영국의 특수한 상황인가?
아니면 백년전쟁의 여파인가?
3. 장미전쟁과 영국 근대화에 대한 이해
맺은 말
* 참고 문헌
1.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역사적 개념 이해
(1) 백년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2) 장미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2. 백년 전쟁과 장미전쟁의 연관성 고찰
(1) 백년 전쟁 후 프랑스와 비교지어 본 영국의 상황
(2) 장미전쟁은 영국의 특수한 상황인가?
아니면 백년전쟁의 여파인가?
3. 장미전쟁과 영국 근대화에 대한 이해
맺은 말
* 참고 문헌
본문내용
강력한 왕권을 이룰 수 있었 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 두 번째 요인을 말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영국 내에서 보여지는 새로운 계급(분명 전쟁 전부터 보여지나 미약하기에) 의 등장과 경제 구조의 변화이다. 위의 전쟁에 따른 영국 내 변화의 양상 중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자유민적 소작인과 같은 예속적 관계 였던 농민의 성장 그리고 영지에 대한 노동력 부족과 이에 따른 양모업에 대한 수용 양성 등과 같은 경제 구조의 변화에 그 요인이 있다 하겠다. 이러한 전쟁을 통해 몰락한 영주와 상반되게 새로운 계층의 성장은 결과적으로 구체제의 유지를 원하는 기득권층인 영주들이 대 영주에게 몰리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라 대 귀족(영주) 간의 충돌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계층을 확보를 통한 자신의 역량 강화를 할 수 있었던 대 귀족 층의 보호 등은 영국을 새로운 체제로 가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이과 같은 요인들은 장미전쟁이 분명 백년전쟁의 여파에 의해 촉발된 것임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
3. 장미전쟁과 영국 근대화에 대한 이해
장미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은 아직은 미약해보일 지는 모르나 절대왕정의 모습을 그리고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이는 왕권의 비호 아래 그리고 자생적으로 느리지만 점진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는 새로운 계급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왕실 귀족들의 소멸은 왕권 강화를 초래했는데,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왕의 수족이 되어 줄 관료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튜더 왕조를 이끌어 가는 실질적인 운영인들이었는데, 이는 세 종류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젠트리(Gentry)라 불리는 지방 영주 출신의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잉글랜드 내에서 귀족이 아니거나 봉건영지가 없어도 젠트리가 될 수 있었으며, 재산면에서 보면 최저 40실링(20파운드)이상의 수입을 내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요먼(Yeoman)이라 불리는 소작인 출신의 무리들이다 이들은 농촌의 선거인 계급으로 40실링 정도 이하의 일정한 수입을 가진 자들로서 농노와 젠트리의 중간층으로 보면 된다.
셋째는 상인들인데 이들은 아직 시기상 상업적인 부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왕권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어느 정도의 위치를 지닌다.
또한 장미전쟁의 종식과 왕권 강화의 기틀을 마련한 헨리 7세는 먼저 잉글랜드의 장래가 대양으로의 진출과 식민지 개척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당시(1500년경)의 유럽은 바람을 이용하여 멀리까지 항해할 수 있는 범선이 출현하고 나침반이 개발되어, 에스파냐의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했던 때였다.
이에 헨리 7세는 존 캐벗에게 원정대를 조직하게 하여 대서양을 건너 1497년 북미 대륙을 발견하도록 하는 민첩성을 보임으로써 북미 대륙에 버지니아를 건설하는 성과를 올렸고,
이것이 곧 이 대륙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근원이 되었다.
또 1489년 항해 조례(Navigation Acts)를 제정하여 일부 수입 품목(보르도산 포도주 등)을 자국의 선박만을 통해 운송하도록 하는 일종의 관세 조치를 취한 후, 이에 반발하는 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 대비하여 대포를 상선에 설치하는 등 영국 해군의 초기모습을 갖추기도 했다.
헨리 7세는 국내 정치에 있어 장미 전쟁시 일부 왕실 귀족과 결탁했던 지방 영주들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든 중대 사건은 중앙 정부가 처리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것은 성실청(星室廳, Court of Star Chamber)으로 그 동안 운영되던 지방의 배심 제도를 철폐하고 대자문회로 구성된 대법정이 모든 중대한 사건들을 관할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에 절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프랑스의 상황과 결부하여 절대 왕정이라는 큰 범주 아래의 또 하나의 연관성을 부여 할 수 있다. 그것은 같은 과정을 가기 위한 환경의 차이에 대한 극복과정으로써 입장으로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본 조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자 한다. 바로 이러한 영국에서 보여지는 강력한 왕권의 시기를 바로 '입헌군주제'로의 이행기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후에 보여지는 왕권에 의해 인위적으로 기능되어진 새로운 계층과의 지배체제 간의 급진적인 해결의 모습을 보이는 프랑스와 왕권에 의지되어지고는 있으나 급진적이지 않은 점진적인 입장으로의 행보를 보이고 있는 새로운 계층과의 차이에 그 것이 있다고 본다. 이는 분명 영국 여타의 국가들과의 다른 근대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맺은 말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인하여 간단하게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왕권강화를 장미전쟁은 영국의 왕권강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왕권강화로 인하여 중세의 전유물이었던 영주권의 약화로 점차 이들 나라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우리는 인간을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등 여러 단계로 나눈다. 왜 이런 것을 행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사람에 대해서 단계적으로 나눔으로써 더욱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는 아닐까 한다.
특히 역사도 비단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전부터 고대, 중세, 현대로 나누곤 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역사에 대하여 더욱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에 기인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은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발판으로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서로의 이해에 따라서 합하거나 떨어뜨려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역사 그 자체로 매력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견해의 다툼 속에서 역사의 발전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 참고 문헌 *
김현수, 『영국사』, 대한교과서, 1997
박지향, 『영국사』, 까치, 1997
배영수 외,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2
뽈 망뚜 著, 정윤형·김종철 譯, 『산업혁명사 上·下』, 창작사, 1987
에릭 홉스봄 著, 정도영·차명수 譯, 『혁명의 시대』, 한길사, 1998
P.Gay·R.K.Webb 著, 박무성 譯, 『서양최근세사』, 법문사, 1983
또한 여기서 두 번째 요인을 말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영국 내에서 보여지는 새로운 계급(분명 전쟁 전부터 보여지나 미약하기에) 의 등장과 경제 구조의 변화이다. 위의 전쟁에 따른 영국 내 변화의 양상 중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자유민적 소작인과 같은 예속적 관계 였던 농민의 성장 그리고 영지에 대한 노동력 부족과 이에 따른 양모업에 대한 수용 양성 등과 같은 경제 구조의 변화에 그 요인이 있다 하겠다. 이러한 전쟁을 통해 몰락한 영주와 상반되게 새로운 계층의 성장은 결과적으로 구체제의 유지를 원하는 기득권층인 영주들이 대 영주에게 몰리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라 대 귀족(영주) 간의 충돌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계층을 확보를 통한 자신의 역량 강화를 할 수 있었던 대 귀족 층의 보호 등은 영국을 새로운 체제로 가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이과 같은 요인들은 장미전쟁이 분명 백년전쟁의 여파에 의해 촉발된 것임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
3. 장미전쟁과 영국 근대화에 대한 이해
장미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은 아직은 미약해보일 지는 모르나 절대왕정의 모습을 그리고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이는 왕권의 비호 아래 그리고 자생적으로 느리지만 점진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는 새로운 계급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왕실 귀족들의 소멸은 왕권 강화를 초래했는데,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왕의 수족이 되어 줄 관료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튜더 왕조를 이끌어 가는 실질적인 운영인들이었는데, 이는 세 종류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젠트리(Gentry)라 불리는 지방 영주 출신의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잉글랜드 내에서 귀족이 아니거나 봉건영지가 없어도 젠트리가 될 수 있었으며, 재산면에서 보면 최저 40실링(20파운드)이상의 수입을 내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요먼(Yeoman)이라 불리는 소작인 출신의 무리들이다 이들은 농촌의 선거인 계급으로 40실링 정도 이하의 일정한 수입을 가진 자들로서 농노와 젠트리의 중간층으로 보면 된다.
셋째는 상인들인데 이들은 아직 시기상 상업적인 부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왕권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어느 정도의 위치를 지닌다.
또한 장미전쟁의 종식과 왕권 강화의 기틀을 마련한 헨리 7세는 먼저 잉글랜드의 장래가 대양으로의 진출과 식민지 개척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당시(1500년경)의 유럽은 바람을 이용하여 멀리까지 항해할 수 있는 범선이 출현하고 나침반이 개발되어, 에스파냐의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했던 때였다.
이에 헨리 7세는 존 캐벗에게 원정대를 조직하게 하여 대서양을 건너 1497년 북미 대륙을 발견하도록 하는 민첩성을 보임으로써 북미 대륙에 버지니아를 건설하는 성과를 올렸고,
이것이 곧 이 대륙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근원이 되었다.
또 1489년 항해 조례(Navigation Acts)를 제정하여 일부 수입 품목(보르도산 포도주 등)을 자국의 선박만을 통해 운송하도록 하는 일종의 관세 조치를 취한 후, 이에 반발하는 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 대비하여 대포를 상선에 설치하는 등 영국 해군의 초기모습을 갖추기도 했다.
헨리 7세는 국내 정치에 있어 장미 전쟁시 일부 왕실 귀족과 결탁했던 지방 영주들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든 중대 사건은 중앙 정부가 처리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것은 성실청(星室廳, Court of Star Chamber)으로 그 동안 운영되던 지방의 배심 제도를 철폐하고 대자문회로 구성된 대법정이 모든 중대한 사건들을 관할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에 절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프랑스의 상황과 결부하여 절대 왕정이라는 큰 범주 아래의 또 하나의 연관성을 부여 할 수 있다. 그것은 같은 과정을 가기 위한 환경의 차이에 대한 극복과정으로써 입장으로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본 조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자 한다. 바로 이러한 영국에서 보여지는 강력한 왕권의 시기를 바로 '입헌군주제'로의 이행기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후에 보여지는 왕권에 의해 인위적으로 기능되어진 새로운 계층과의 지배체제 간의 급진적인 해결의 모습을 보이는 프랑스와 왕권에 의지되어지고는 있으나 급진적이지 않은 점진적인 입장으로의 행보를 보이고 있는 새로운 계층과의 차이에 그 것이 있다고 본다. 이는 분명 영국 여타의 국가들과의 다른 근대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맺은 말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인하여 간단하게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왕권강화를 장미전쟁은 영국의 왕권강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왕권강화로 인하여 중세의 전유물이었던 영주권의 약화로 점차 이들 나라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우리는 인간을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등 여러 단계로 나눈다. 왜 이런 것을 행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사람에 대해서 단계적으로 나눔으로써 더욱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는 아닐까 한다.
특히 역사도 비단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전부터 고대, 중세, 현대로 나누곤 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역사에 대하여 더욱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에 기인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은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발판으로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서로의 이해에 따라서 합하거나 떨어뜨려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역사 그 자체로 매력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견해의 다툼 속에서 역사의 발전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 참고 문헌 *
김현수, 『영국사』, 대한교과서, 1997
박지향, 『영국사』, 까치, 1997
배영수 외,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2
뽈 망뚜 著, 정윤형·김종철 譯, 『산업혁명사 上·下』, 창작사, 1987
에릭 홉스봄 著, 정도영·차명수 譯, 『혁명의 시대』, 한길사, 1998
P.Gay·R.K.Webb 著, 박무성 譯, 『서양최근세사』, 법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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