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씨네필 문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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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씨네필 문화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1세대 씨네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은 누구이며 최초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영화 들은 무엇인가?

2. 한국의 씨네마테크, 프랑스, 독일 문화원에서

3. 대학 영화써클 : 이곳에서 새로 시작한다.

4. “영화”전문잡지 탄생하다.

5.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기억하는가?

6. EBS 『시네마천국』: TV로 영화를 교육받다

7. 씨네필이여 부활하라.

본문내용

시네마」, 「사이트 앤 사운드」,「빌리스 보이스」의 기자들도 구로사와를 보기 위해 달려 왔다. 나는 그들이 오늘 만나기로 했지만 취소해버린 감독들이나 스타들의 명단을 알고 있었다. 이틀 전 파리로부터 날아온(단 삼십분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정말 시간이 되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어나서 가버리면서 결코 인터뷰현장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던 오만무례한) 이자벨 아지니를 만나는 순간도 그렇게 분위기가 설레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때 구로사와가 아니라 오즈에 미쳐 있었다. 그래서 구로사와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심정마저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구로사와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심정마저 갖고 있었다. 그는 일본영화 감독이라기 보다는 서방세계 영화의 모더니즘의 전통 안에서 영화를 만드는 스타일리스트이며, 정신적인 사유와 정서의 작가라기보다는 이미지­액션을 중심에 놓고 활극과 장르에 의지하여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시네아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로부터 배움을 얻기보다는 물리쳐야 할 작가주의의 계보라고 서둘어 결심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막 서른이 되고 있었고, 겨우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 <천국과 지옥>, <요짐보>, <쓰바키 산주로>,와 <카게무샤>, 그리고 <란>만을 보고 이 영화의 거인을 모두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구로사와는 사진에서보다 훨씬 큰 키를 하고 조금 느린 걸음으로 들어 왔다. 그리고 천천히 우리들을 둘러 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며, 원래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가운데 자리한 붉은 카페트 위의 그 자리에 올라앉았다. 우리들은 마치 천황 앞에 늘어선 대신들 같았다. 첫 번째 질문은 그의 다음 영화인 <꿈>에 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구로사와의 목소리는 다소 날카롭지만 저음이었다. 조용하게 질문이 오고갔다.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오마쥬와 그에 관한 살아있는 긍정처럼 보였다. 그걸 참지 못하고 (철없는)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질문했다. "<라쇼몽>이 아시아 영화로서 처음 서방세계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것은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아시아 영화에 대한 헛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닙니까?" 나는 질문을 던져놓고서야 아차,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나를 돌아보았으며, 「까이에」의 조엘 마뉘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아키라는 선글라스 넘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리게 대답했다. "난 그 상을 갑자기 받았지요. 이상하지요? 상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상과 관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나에게는 그 상이 필요했습니다. 그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격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은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영화를 만들면서 같은 동네에 살면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구로사와는 나에게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이 동네에 사는 어른처럼 철없는 어린 나에게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격려하는 방법으로 사랑하는 그 의사소통의 의미를 새롭게 일러 주었다. 나는 정말로 그의 모든 영화가 담고 있는 그 휴머니즘을 이 순간에 의지하여 껴안는다.『9』
『9』정성일 KINO 1998년 10월호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바침 1910∼1998 중에서
난 진정한 씨네필의 정신이란 이런 것이라 말하고 싶다. 아키라의 말처럼 이 세상의 모든 영화인들이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 하나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즉 다시 말해 나이와 국경을 초월해 서로가 서로를 끌어 안을 수 있을 때 시네필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나는 스스로를 절대자의 위치에 올려놓은 적이 있다. 영화가 그 위치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영화를 만들면 왕가위는 그 따위쯤이 될 것이고, 장준환의 상상력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망상력을 가진 그리고 고다르의 혁신적 영화문법은 고루한 텍스트의 일부쯤으로 취급될 그런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망상을 했다.
스스로를 자각하며 진정한 씨네필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난다.
그렇다면 이제 이 한국의 씨네필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난 『씨네필이여 소통하라』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한국영화 점유율 60%를 넘어가고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가 천막관객을 넘어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씨네필들의 소통이 왠 말이냐 하겠지만 이 곳 대한민국은 "좋은"영화보기 힘든 곳으로 소문난 곳이다.
멀티플렉스에 가면 지겨운 쓰레기 같은 영화들만 걸려 있고 "좋은 영화"는 걸리기 무섭게 간판을 내리고 있다.
독립 혹은 흥행에 불필요한 요소가 있는 작은 영화들은 배급망을 잡지 못해 개봉초차 못하는 것이 이 곳의 현실이다.
80년대 영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사람들은 지금의 충무로 상업영화의 최전선에 앞장서고 있다. 그들은 자본의 논리로써만 영화를 만들어 가고 있으며 그들 스스로가 행했던 과거의 모습을 되돌아 볼려고는 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에 한국의 영화들이 좋은 수준으로 올라서고 있지만 지금의 기형적 지형도는 불안함을 떨쳐버릴수는 없다. 과거 홍콩의 예를 보아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튼 구체적 방법제시를 하고 싶지만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씨네필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더욱더 커져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계속 이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글은 월간 <키노>와 <씨네21> 그리고 <김석영님의 정성일 팬 싸이트>에 많이 기대여 작성되었습니다. 교수님의 과제인 "영화의 역사"책은 두 번 읽었으며 단순한 요약보다도 뭔가 다른 리포터를 작성하고 싶어 『씨네필 문화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개인적 학습의 결과물을 대신 제출 하였습니다.
스스로 씨네필이라고 자부했지만 요즘들어 영화사랑이 나태해 져 가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채찍질 하는 마음으로 이 리포터를 작성했습니다.
앞으로 좋은 강의 계속 부탁드립니다.
REPORT
제목 : 한국 씨네필 문화의 역사
과 목 : 서양 영화사
학 과 : 전기전자과
학 번 : 97262066
이 름 : 박 수 민
담당교수 : 이지영 교수님
제출일자 : 04년 6월 11일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06.16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5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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