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적(일본관련서적) 감상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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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서적(일본관련서적) 감상문 3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순서)
1.도쿄 이야기
2.나는 한국 노래가 좋다
3.일본 공산주의 운동과 천황제

본문내용

을 등에 업은 타율적인 혁명운동은 에시당초부터 실패의 요인을 안고 출발한 것이다. 소련 중심의 혁명이론은 일본 측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 실정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일본 공산당은 1922년 창립이래 공산당 내부에서도 천황제 폐지에 대한 강령을 채택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일본 국민들의 정신적 결속의 상징인 천황을 폐지하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될 우려가 있었고 일단은 보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애초부터 절름발이로 시작한 사회운동으로서 이는 비록 외양상 특정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강령배제라고 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지나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결함을 지닌 일본의 공산주의는 1923년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사형 공포를 함으로써 1차 해체를 하고 만다.
일본 공산당은 어렵게 재건이 이루어졌지만, 소련은 31년 테제 이후 소련은 일본에 대한 지원을 대폭 정리하는데, 아마도 이는 일본의 국가 구조의 성격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전에 소련은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서 지주라는 봉건적 계급과 부르조아 계급에 기반을 두면서 긴밀한 블록을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천황제는 바로 착취 계급의 공고한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론은 사회주의 사상의 표면상 그 구조적 특성을 지적한 것으로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소련의 평가 중에 중요한 결점이 있다면 바로 천황제와 일본 국민과의 정신적 결속력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소련의 지원이 축소된 이래 일본 공산당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는 계속된다. 특히 총선거 당시의 슬로건에서 천황제에 대한 반대 강령은 정부로 하여금 '치안유지법'을 입법화하여 공산당을 탄압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다. 공산당은 결국 비합법적 지하활동으로 노선을 전개하여 폭력투쟁의 양상으로 접어들게 된다. 1930년대의 대공황 당시 경제적 위기에 편승하여 공산당은 상당한 노동자층의 공감을 얻어 그들로 하여금 무장 봉기를 선동하는 등 다소 분투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일본의 여러 사회주의 정당 세력의 분열과 1932년 이후 정부의 무차별 공산당 탄압과 검거로 인해 사실상 붕괴에 이르고 만다.
아마도 일본 공산당의 최대의 비극은 검거 직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1932년 '사상범에 대한 유보처분 취급규정'을 제정하여 본격적인 공산당원 전향화에 착수한다. 회유에 의한 정부의 정책은 결국 검거자 99%당원의 대량 전향이라는 결과를 이루어내고 만다.
사상전향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물론 전향자들이 표면상 당장의 위기 극복 차선책의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공산당 최고 중앙위원으로서 사실상의 일본 공산당의 대표인 사노 마사부의 전향 과정에 있다. 사노는 전향 권고를 포함한 심문과정에서 자신은 일본의 공산화에 대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전향하고 만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옥에 수용되어 대중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두려웠기 때문이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상당히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일본 수상이 애초에 공산당을 탄압하는 이유로 낸 성명서에서는 '국체 보전'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그네들이 말한 일본적 민족 세계관은 무엇일까? 바로 천황의 국가와 그에 헌신하는 인간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정부로서는 일본 공산당의 중요 강령으로 일본 천황제의 폐지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산당의 활동은 곧 일본 국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정부는 공산당에 대해서 강력한 탄압 정책을 고수했다.
공산당의 최대의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민중에 의한 부르조아 계급 타파이다. 먼저 그런 과정을 지나서 그들에게서 빼앗은 자본과 생산수단의 공동소유화를 통한 공산주의 사회가 목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공산당의 가장 우선 사항은 민중의 참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민중의 사상은 절대로 천황제와 유리될 가능성이 당시로는 전무했다. 명치유신 이후로 일본 파시즘은 반체제운동의 구체적인 행동과 사상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가장 깊은 정신적 영역인 종교적 차원까지 천황제란 이름으로 구속하였다. 이는 일본 민중으로 하여금 종교에 가까운 통합력을 강제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밝고 있던 일본 사회에서 공산당이 천황제를 압도할 만한 사상적 근거를 대중으로 하여금 확립하는데 실패한 것이 최대의 원인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이 점에서 일본 공산당 초기 단계에서 천황제 폐지를 보류한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요인을 안고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을 설득시키는데 실패함으로써 그 어떤 노동운동도 공산당의 목표와는 연결이 될 수 없었다. 대중의 참여가 없는 노동운동은 문자 그대로 공산당원, 그들만의 운동이었다. 사노 마사부는 천황제 폐지가 이미 대중에게 설득력이 없음을 깨닫고 동시에 천황제 폐지가 없이는 공산주의 실현이 불가능함 또한 깨달았다. 이러한 고립무원의 상태는 자신이 추구한 민중의에 의한 사회 실현의 좌절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히려 단순하고, 소박하게도 감옥에서의 느끼는 대중으로부터의 고독감밖에 없었다. 이런 절대절명의 절망감에서 그에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사노 마사부의 전향 과정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난 후 엘리트 출신의 한 지식인의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천황제가 낳은 폐단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들이 있다. 결국 일본의 우익화를 상징하는 천황제는 전 세계를 혁명의 물결에 태운 사상인 공산주의를 시작부터 일격에 무력화 시킬 정도로 일본 대중들에게 정신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분명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로서 현재까지 잔존하고 있다. 일본 공산주의에 대해서 그 동안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만큼 나름대로 흥미있는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참고 서적
1. E.사이덴스티커, 『 도쿄 이야기 』, 이산
2. 가와카미 히데오, 『 나는 한국노래가 좋다 』, 창해, 1999
3. 정혜선, 『 일본 공산주의 운동과 천황제 』, 韓國資料院,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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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30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8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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