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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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고전고대
제 1 장 노예제적 생산양식
제 2 장 그리스
제 3 장 헬레니즘 세계
제 4 장 로마
Ⅱ.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
제 1 장 게르만적 배경
제 2 장 게르만의 침입
제 3 장 종합을 향하여
Ⅲ. 서유럽
제 1 장 봉건적 생산양식
제 2 장 사회구성들의 유형론
제 3 장 북유럽
제 4 장 봉건제의 역동성
제 5 장 봉건제의 전반적 위기
Ⅳ. 동유럽
제 1 장 엘베강 동쪽
제 2 장 유목민의 제동
제 3 장 발전의 유형
제 4 장 동유럽에서의 위기
제 5 장 다뉴브강 남쪽

본문내용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유럽 봉건제가 맞은 전반적인 위기의 경제적 결과가 어찌하여 두 지역에서 전적으로 상반되게 나타났던가 다시 말해 어찌하여 서유럽에서는 봉건의무의 금납화 및 농노제가 점차 소멸되고 동유럽에서는 장원체적 반동과 농노제의 이식이 나타났던가 하는 문제의 가장 근원적인 이유이다.
제 5 장 다뉴브강 남쪽
스칸디나비아는 동유럽 지역과 유사한 지대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 역사적 진전과정이 구분되어진다. 왜냐하면 스칸디나비아는 고전고대의 도시적·제국적 유산이라는 혜택을 받지 못한 채로나마 궁극적으로 봉건제의 서유럽적인 한 변형을 성립시켰던 데 반해, 발칸반도는 이 지역에 로마의 후계국가가 오랫동안 총본산격으로 본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봉건제의 안정된 동유럽적 변형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잔틴국가는 그곳에 정주하게 된 슬라브족 및 우랄 알타이계 만족과의 충돌에서 서유럽적 유형의 영속적인 봉건적 종합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잔틴제국의 계속적인 생존을 결정지었던 것은 지리적 조건이 아니라, 서방과는 달리 외부로부터 적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거나 혹은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한 사회구조였다. 비잔틴에서는 로마제국 말기의 콜로나투스제에 의해 도입된 농민의 토지결박이 점차 소멸되고, 개별적인 사적 토지를 가지고 국가에 대해 집단적인 재정책임을 지는 농민들로 구성된 아주 많은 자유로운 촌락공동체가 유지되었다. 이리하여 비잔틴은 비록 영토는 줄어들었지만 고전고대의 상부구조적 장비 일체를 거의 전적으로 그대로 간직한 채 서유럽의 암흑시대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비잔틴은 노예제적 생산양식과 봉건적 생산양식 사이에서 전자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후자 쪽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일종의 사회적인 막다른 골목에 끼여 오금박힌 상태로 머물러 있었으니, 그같은 막다른 골목의 귀결점은 결국 비잔틴의 소멸일 수밖에 없었다. 아주 강력한 제국의 관료제와 잔존하는 노예경제라는 이 두 가지가 농촌에서 계급이 양극화되어 토지에 대한 봉건적 착취와 영주적 분리주의로 나아가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경향을 가로막는 데 끊임없이 작용하였으며, 도시 또한 중세적인 코뮌 자치주의를 향해 발전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통치권의 근본적인 세분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서유럽형의 도시적 역동성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이같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를 드러내주는 징후는 다름아닌 비잔틴 제국의 귀족정 및 군주정 자체의 법적 성격이었다. 비잔틴의 토지소유자들은 언제나 도시에 거주하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는 농업생산에서 훨씬 직접적인 본래적 역할을 하고 있던 서유럽 봉건귀족층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던 것과는 대조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농업의 생산양식이 부딪힌 출구없는 상황은 농업기술의 정체로 이어졌으며 비잔틴제국의 군사적 팽창은 역사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비잔틴의 사회구성은 표면상으로는 궁극적인 '봉건화'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 과정에서 유기적이거나 자생적인 응집성은 결코 달성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비잔틴 말기의 봉건적 형태들은 별다른 변화없이 지속된 통일적인 제국적 정치단위가 장기간에 걸쳐 해체되는 과정의 최종적 결과였으며 이는 서유럽봉건제를 탄생시킨 과정과는 정반대되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발칸반도에서는 이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서유럽형 봉건제의 대두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 법한, 만족의 사회질서와 제국적 사회질서 사이의 역동적 융합이 어찌하여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분명히 발칸반도에서 만족침입 이후 시기의 질서와 제국후기의 질서가 기묘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점에 있다. 어느 세력도 다른 편을 항구적으로 압도할 수 없으면서도 양쪽 모두 상대편에 대해 거듭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양자 사이의 충돌은 새로운 종합이 태어나게 할 만한 전반적인 격변의 형태를 띤 것이 아니라 서서히 상호간에 파괴를 초래하고 서로를 마멸시키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남동부 유럽을 서유럽으로부터 분리시켰던 이같은 과정의 두드러진 징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화적 지표로서 이들 두 지역에서는 종교적·언어적 발전의 전반적 기본형이 대단히 달랐다. 서유럽에서는 분파주의적 이단이 보편주의적 정통교리 및 언어상의 라틴주의에 길을 비켜주었음에 반해 동남부에서는 이교가 언어상의 라틴주의의 테두리안에서 온존되어 온 분리주의적 정통교리에 무릎을 꿇었다. 만족 대 비잔틴의 관계가 문화적 측면에서는 후자의 상대적 약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정치·경제적 측면에서는 이에 못지 않게 전자의 독특한 한계를 가리켜주고 있다. 비잔틴, 불가리아 및 세르비아 사이에 벌어진 순환적인 경쟁은 14세기말까지는 모두 함께 후퇴하고 몰락하는 사태로 끝나버렸다. 중세 발칸반도의 취약한 국가체제는 오스만 투르크가 이를 정복하여 접수하기 이전에 전반적인 위기에 빠져 있었다. 발칸반도에서 더 이상의 자생적 발전의 가능성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것은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측으로부터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지고 나자 발칸의 불안정한 국가구조에는 이슬람침입에 맞서서 투쟁을 계속해갈 만한 여력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한 남은 기회는 발칸반도를 구하기 위해 서유럽봉건사회에 의해 조직된 방위적 원정이었다. 두 차례의 국제적 십자군은 오스만 투르크군에 의해 차례로 격파당하였다. 서유럽 봉건제는 이제 내적으로도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어서 전성기와 같은 승리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고 이러한 환난 속에서 남동부 유럽은 일시적으로나마 유럽대륙 전체의 운명과 연결되기도 했지만 그 후로는 다시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유럽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버렸다.
이렇듯 중세세계는 전반적 위기 속에서 종말을 맞았다. 봉건제의 본고장인 서유럽도, 봉건제가 전파되었거나 혹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던 동유럽의 영토도 모두 15세기초까지는 사회경제적 붕괴와 변질의 심층적인 과정이 일어나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 이같은 변화가 유럽의 정치질서에 초래할 변화는 아직 대부분 감추어져 있었다. 이로부터 성립하게 될 국가체제의 귀결은 앞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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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09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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