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18세기의 사회 변동과 정조의 개혁 정치에 대한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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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기(起) - 문제제기

Ⅱ. 승(承) - 18세기에 대한 연구와 문제점

Ⅲ. 전(轉) - 17~18세기의 사회와 정조의 개혁 정치
1. 17~18세기의 사회변동과 정치상황
2. 정조의 개혁 정치

Ⅳ. 결(結) - 정조의 개혁 정치의 비판적 평가와 역사적 교훈
1. 정조의 개혁 정책에 대한 정치학적 비판 - 「정치가 정조」를 중심으로
2. 정조의 개혁 평가와 역사적 교훈

본문내용

를 강력히 견제하는 수준에 그쳤다.
넷째, 인재선발 방식의 변화를 근본적으로 도모하지 않은 점이다. 특히 영·정조 모두 과거제를 본격적으로 개혁하지 못했다.
다섯째, 경제개혁에서도 영·정조 모두 토지개혁에 손대지 못하고, 상공업 강화책을 사용하지 못한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제도개혁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의 개혁을 먼저 고려하는 정조의 본질주의적인 개혁은, 비록 보수적인 개혁이긴 하지만 주체가 정조처럼 학문수준이 뛰어나 그 주변 사람들을 높은 수준으로 끌고 가면서 원칙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엄청난 효과를 볼수 있다. 그러한 사회분위기의 결과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의 개혁안이라든가 연암 박지원의 소설 같은 것이다.
또한 탕평책을 추진하면서 국왕의 역할을 '중재 자'에 두고 붕당간의 의리와 인재를 고루 혼합하는 데 힘써 당쟁이 재연할 기미가 엿보이면 두 세력을 맞서게 하되 제3의 세력을 내세워 이를 조정하는 '중재의 리더십'(大承氣湯)을 발휘했던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예를 들면 천주교 문제에 연루된 남인의 단점을 청나라의 북학과 패관 소품체에 심취해 있는 노론의 문제점과 대비시켜 서로를 견제케 한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신분과 지역을 뛰어넘어 인재들을 끌어 모아 조선후기 르네상스를 꽃피운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왕이었음은 결코 부인 할수 없을 것이다.
즉 정조의 개혁은 많은 한계점들이 있었지만, 그 성과가 매우 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물들 중의 하나로써, 일관되게 지켜온 그의 정치개혁 기조들은 '세계화'와 '민주복지 실현', '정쟁의 종식과 국민 대 화합'을 목표로 하는 오늘 날에도 본받아야 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1776년 즉위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정조는, 2년 뒤에 대략 정치개혁의 총론이 담긴 교서(敎書)를 발표하였는데, 다음의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시비(是非)의 논쟁'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시비 논쟁이란 원래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인데, 당쟁이 극심해지자 상대편을 죽이는 데로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어 사도세자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한쪽의 정치세력은 실권을 장악하고 반대편은 죽게 되는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사람들을 좋아했을 리 없었겠지만, 이를 당시의 정치 논제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즉, '정치원칙인 의리는 의리로, 부모에 대한 애통은 애통으로' 구분한 것이다.
둘째, 관직배분에서 균형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벌 사이에 균형을 지키는 것과 지역 사이에 균형을 지키는 것으로 나뉜다. 당시 문벌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 좋은 문벌이 아닌 사람도 함께 써서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본거지가 주로 경상도 지역인으로서 문벌 대열에서 도태된 남인세력과 함경도 평안도 지역사람들도 등용하여 지역간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즉, 전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정치원칙을 절충해서 재창조하겠다는 것이다. 정조는 소모적인 '시비 논쟁'은 없애되 정치원칙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젊은 인재를 끌어 모아 개혁을 앞장서 추구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이전의 정치원칙을 종합해서 그보다 윗단계의 정치원칙을 만들어 나아가고자 하였다.
넷째, 군주권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왕권강화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군대의 장악이 가장 중요하였다. 이에 5군영의 힘을 약화시키고 새로이 장용영(莊勇營)을 설치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집중시켜 나갔다. 또한 중앙정부의 지방지배력을 강화하여 조세도 제대로 거둬들이고 백성도 완전하게 파악하고자 하였다.
다섯째로,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이상국가의 실현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단순한 절대권력자로서만 군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되고자 하였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로서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되려면 철저한 자기반성과 각고의 노력, 그리고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조선 시대 역사상 스승으로서 존경받은 임금은 세종과 정조뿐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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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3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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