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 통일 신라의 영광, 그 남은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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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에 행해지고는 끝나고 있다.
황룡사의 주지로서는 제 1대가 진골 환희(歡喜) 법사, 제 2대가 자장 율사, 다음이 국통(國統)이던 혜훈(惠訓) 그 다음이 상(廂) 율사(律師)였다.
6. 황룡사의 가람 변천에 관한 고찰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 가람은 진흥왕 14년 (서기 553)에 창건된 가람에서 고려 고종 25년(서기 1238)에 전쟁으로 불타 없어질 때의 가람에 이르기까지 사이에 크게 세번의 변화를 겪었다.
1) 창건 가람 : 신라 진흥왕 14년에 월성 동쪽이며 용궁 남쪽에 신궁(紫宮)을 짓다가 그 곳에서 황룡이 출현하였기에 이를 고쳐 불사로 만들고 황룡사(皇龍寺, 黃龍寺)로 이름지었다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타난다. 진흥왕 27년에 황룡사 공사가 끝났다 하고, 또 진흥왕 30년에 주위의 담을 만들어 17년만에 완공했다고 하는 기록에 있는 바와 같이 사찰의 중심부와 그 주변의 부속 건물 및 절의 구역을 정하는 담장 등의 모든 공사가 끝났을 때의 가람이다.
2) 중건 가람 : 신라 진흥왕 35 년(574)에는 구리 3만 5천 7근과 도금용 금 1만 198 푼을 투입하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으며 진평왕 6년(584)에 다시 황룡사에 금당을 조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전인 진흥왕 36년에는 봄과 여름에 가물어 황룡사 장육상이 눈물을 흘려 그것이 발꿈치에 달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육존상이 처음에는 창건 가람의 금당 또는 다른 어떤 건물에 안치하기 어려운 일이며 특히 창건 시기의 금당은 그 중문이나 회랑의 양상으로 보아 장육입상을 안치하는데 충분한 크기의 건물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안치하는 충분한 크기를 갖는 금당이 필요하게 되어 진평왕 6년에 금당이 중건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금당 중건에 이어 선덕왕 12년(643)에 기공하여 그의 14년에 구층목탑이 완공될 시기에 일단락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본격적인 가람이다.
3) 종루(鐘樓)와 경루(經樓)의 신설 : 중건 가람에서는 분명히 계획되지 않았던 종루와 경루로 보이는 두 건물이 회랑에 의해 둘러싸인 공간 내이며 구층 목탑의 동남쪽과 서남쪽에 새로이 설치하게 되었다. 이 두 건물의 신설에 따라 중건 가람의 중문과 남회랑이 다시 남쪽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가람 전체의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이 종루와 경루로 보이는 건물의 평면 모습이 당초 정사각형 평면의 건물이었으나 그후 오방형 평면으로 개조되고 이 개조된 시기를 전후하여 중문이 다시 개조 신축되었다. 이 가람이 고려 고종 25년에 몽고의 침입에 따른 전쟁에 의해 불타버렸다.
참고 문헌 - {황룡사}, 문화재 관리국 문화재 연구소 (이 책은 발굴 조사 보고서임)
답사 포인트 -- 황룡사의 그 드넓은 터에 세워졌을 그 거대한 건축물들 - 9층 목탑, 금당, 장육존상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신라가 통일할 수 있었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조그마한 분황사와 비교해 보기, 혹은 황룡사의 자장과 분황사의 원효를 비교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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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8.01
  • 저작시기2004.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2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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