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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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농민 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접지역인 정읍에 비해서 적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정읍은 일찌기 향토사학자를 비롯한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향토사 발굴 노력과 자생적으로 조직된 지역의 민간단체들이 동학제를 매년 치러냄으로서 기반을 다져 왔다고 한다. 그 결과 유적지의 홍보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라는 인정을 받아 오다가 근래의 동학농민혁명 100주년기념사업을 계기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창지역은 그동안 동
학농민혁명과 관련된 특별하고 지속적인 노력들이 많지 않았는데 최근에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가 고창읍 당촌마을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인정되면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또한 고창은 동학농민혁명과 상관없이 이미 전국에 널리 알려진 문화유적들이 있다. 모양성으로 더 알려진 고창읍성과 선운사는 이 고장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이제 두 유적지의 명성에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보태지게 되었다. 무장남문안의 무장동헌도 마찬가지의 경우인데, 여기에다 농민군이 진을 친 여시뫼와 제1차 기포장소인 당산마을이 있고, 손화중장군의 세력 근거지인 괴치리 일대와 체포되었던 수강산의 산당 등이 있다. 그러나 위에 거론된 유적지들은 외지인들이 답사할 때 고창읍성과 선운사를 제외하고는 위치를 찾기가 매우 어렵고 당산마을과 여시뫼를 제외하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유적지임을 알 수가 없었다. 고창군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안내문이나 관련 홍보가 거의 없는 상태라고 한다. 당촌마을이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라는 사실도 지역민들은 거의 모르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니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동학농민혁명은 그 사실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채 많은 부분들이 베일속에 가려져 있다. 이제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있어서 더욱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전체사로서의 역사만이 아니라 지방사 연구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창지방은 동학농민혁명의 전과정을 걸쳐서 가장 안정적이고 활력있는 혁명의 진앙지로서 역할해왔다. 무장에 이르러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비로소 군대를 구성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혁명의 큰 그림을 그려나갔다. 농민군 최초의 선전포고이자 호소문이었던 무장창의문]이 그렇고, 동학농민혁명의 과정에서 후방에서의 방위와 군량미 공급을 맡았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또한 그렇다.
그러나 고창은 오랜 세월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는 혁명의 진앙지로서 가혹한 탄압과 억압속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제대로된 연구가 부족했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또한 오랜 세월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참가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떨쳐버리지 못했던 피해의식도 혁명사의 복원을 가로막았다.
고창지방의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지나간 과거사에 대한 회고적 연구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의 지역적 조건과 주민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전체사를 파악하는 실마리가 될뿐만 아니라 고창의 지역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의 첫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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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8.20
  • 저작시기2004.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3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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