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루기도 한다. 또 지붕은 두껍고 처마가 네 귀에서 위아래가 모두 곡면으로 들리며 일부의 탑에서는 기단도 단층으로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석탑은 전성기 선라 석탑이 보여주는 당당한 느낌은 줄어들고 기단이 좁아 안정감이 적은 반면 탑신의 층수가 많아 하늘로 치솟는 느낌을 준다.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의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과 국립대구박물관의 정도사지 오층석탑,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그리고 경천사 십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고려 석탑의 또 하나의 특수한 예로 경천사지십층석탑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 탑은 고려 말기인 충목왕 4년(1348년)에 세워진 것으로 평면이 사면돌출형인 기단을 3단으로 쌓고, 탑신은 3층까지는 사면돌출형을 유지하다가 4층부터는 사각형으로 올렸으며, 상륜부는 사면석주형으로 마감하고 있다. 백색 대리석을 재료로 하여 기단으로부터 탑의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온통 불보살, 신중, 운룡, 초화, 동물 동을 표면에 새겨 넣고 탑신에는 층마다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목조 건물의 온갖 부재를
세밀하고도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아예 탑 전체가목조 건물을 방불케 하며 석탑이면서도 대작의 세련되고 화려한 석조 공예품을 대하는 듯한 칙각을 일으킬 정도인데, 이 석탑 또한 고려시대 석탑장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 (그림 경천사지십층석탑)
불교는 고려시대 말기에 들어 국가의 무분별한 비호와 불교 집단 세력의 비대정상적인 성장으로 오히려 사회적인 부패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일어섰던 신흥사대부들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건국하면서 유교를 실천 이념으로 표방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지배층의 문화도 서서히 유교적분위기로 탈바꿈하게 되고, 불교는 관료들의 비판과 억압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석탑은 새로운 양식이 성립됨이 없이 전대의 작품을 모방하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다.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당시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본뜬 것이며, 함양의 벽송사 삼층석탑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과 형식상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 신륵사 다층석탑의 기단부 조형은 원각사 십층석탑에서 착상의 실마리를 얻고, 탑신부는 고려 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인 강릉 선복사지 십층석탑을 모방하고 있으며, 양주의 묘적사 칠층석탑과 수종사 오층석탑은 만듦새가 매우 비슷하여 한 장인 두 탑을 조성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그 원형은 고려시대의 다각다층석탑에 남아 있다.
(원각사지십층석탑) (함양벽송사삼층석탑) (신륵사 다층석탑)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의 한 분류로서 모방에 머물렀지만 표현 양식은 대체로 선이 두텁고 표현이 담백하며 정중한 느낌을 주어 유교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결국 조선시대 석탑은 독창적인 양식을 창출하지 못한 채 아쉽게도 끝을 맺었다. 조선시대에는 결코 조탑활동이 활성화될 수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팽배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목탑이나 전탑, 모전석탑, 금동탑과 같은 빼어난 작품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탑하면 곧 석탑을 떠올리듯 우리 불탑의 역사 속에서 석탑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사찰의 중심 건물인 거대한 석조 건물로 세워지고,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석조물로서의 빼어난 조형미와 확고한 전통양식을 뿌리내렸으며, 시대를 거듭하면서 다양한 스타일과 장식으로 갈래를 뻗었기에 우리의 석탑은 어디서나 인상 깊게 시선을 끈다. 기개 서린 명탑이든 무던한 무명 탑이든 모두 역사와 문화의 성쇠를 반영하는 주인공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탑, 목탑, 석탑을 알아보았고. 특히 우리나라 석탑에 관한 시대적인 발달사까지 알아보았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전탑의 나라인 중국은 그들의 권위와 부를 과시하고. 백성들을 다스릴 목적으로 탑을 대단히 높게 만들었고. 이것을 통해 백성들 스스로를 낮추고 왕의 지배에 순응하도록 길들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목탑은 그들의 문화에서 볼수 있듯 중국처럼 크지 않고 화려한 외부 장식도
하지 않아 순후하게 보이지만, 사무라이의 칼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단히 차갑고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하다. 또한 좁은 공간에 대한 적응력을 알수도 있는 구조물로 되어있다는 것도 알수있었다.
그럼 우리의 석탑은 어떠한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고, 그 규모면 에서도 중국, 일본과는 비할 바가 못 되나 많은 인원수가 일시에 탑돌이를 할 수 있어 가장 많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즉 우리 전통문화 사상과도 어울리는 인간존중의 사상이 묻어 나온다. 또한 우리의 탑은 깨달은 부처가 온갖 세속의 장식을 거부하듯이 대단히 단순하며 꾸밈이 없다.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한 끝에 마침내 부다가야에서 정각에 이른 모습니다. 탑돌이의 공간은 외부에서 도는 개방형이라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대범한 마음이 엿보인다. 이는 마치 평소에는 선량하던 시민이 문이 닫히고 좁은 자동차 내부에 들어갔을 때 좁은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난폭해지는 우리의 모습과 비교되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낮은 천장에 좁은 문이 달려있는 폐쇄형의 자동차가 아니라, 개방형의 달구지를 타고 다닌다면 모두들 밝은 미소와 양보로써 우리의 마음도 더욱 훈훈해 질 것이다.
끝으로 우리 나라 석탑에 장인의 맥이 끊어 진 것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전통 석탑의 조형미를 뛰어 넘는 새로운 스타일의 석탑을 기대할 수도 없으며 정녕 옛것을 완벽하게 베끼기에도 힘겨운 실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조상들이 이루어 낸 석탑이 보여준 수준 높은 조형미를 되새기면서 모두가 관심을 갖고, 그 속에 있는 염원을 한번쯤 되새겨 볼 것을 기약해 본다
△ 참고문헌
이정수/박원출/조원영 - 테마가 있는 한국문화, 선인
백성광 - 문화유산과의 산책, 맑은소리
김현준 -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 효림
김정기 - 문화유산 상식 여행, 이토
장경호 - 한국의 전통문화, 문예
각종 탑 관련사진은 박물관 웹사이트 참고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석탑은 전성기 선라 석탑이 보여주는 당당한 느낌은 줄어들고 기단이 좁아 안정감이 적은 반면 탑신의 층수가 많아 하늘로 치솟는 느낌을 준다.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의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과 국립대구박물관의 정도사지 오층석탑,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그리고 경천사 십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고려 석탑의 또 하나의 특수한 예로 경천사지십층석탑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 탑은 고려 말기인 충목왕 4년(1348년)에 세워진 것으로 평면이 사면돌출형인 기단을 3단으로 쌓고, 탑신은 3층까지는 사면돌출형을 유지하다가 4층부터는 사각형으로 올렸으며, 상륜부는 사면석주형으로 마감하고 있다. 백색 대리석을 재료로 하여 기단으로부터 탑의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온통 불보살, 신중, 운룡, 초화, 동물 동을 표면에 새겨 넣고 탑신에는 층마다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목조 건물의 온갖 부재를
세밀하고도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아예 탑 전체가목조 건물을 방불케 하며 석탑이면서도 대작의 세련되고 화려한 석조 공예품을 대하는 듯한 칙각을 일으킬 정도인데, 이 석탑 또한 고려시대 석탑장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 (그림 경천사지십층석탑)
불교는 고려시대 말기에 들어 국가의 무분별한 비호와 불교 집단 세력의 비대정상적인 성장으로 오히려 사회적인 부패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일어섰던 신흥사대부들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건국하면서 유교를 실천 이념으로 표방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지배층의 문화도 서서히 유교적분위기로 탈바꿈하게 되고, 불교는 관료들의 비판과 억압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석탑은 새로운 양식이 성립됨이 없이 전대의 작품을 모방하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다.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당시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본뜬 것이며, 함양의 벽송사 삼층석탑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과 형식상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 신륵사 다층석탑의 기단부 조형은 원각사 십층석탑에서 착상의 실마리를 얻고, 탑신부는 고려 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인 강릉 선복사지 십층석탑을 모방하고 있으며, 양주의 묘적사 칠층석탑과 수종사 오층석탑은 만듦새가 매우 비슷하여 한 장인 두 탑을 조성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그 원형은 고려시대의 다각다층석탑에 남아 있다.
(원각사지십층석탑) (함양벽송사삼층석탑) (신륵사 다층석탑)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의 한 분류로서 모방에 머물렀지만 표현 양식은 대체로 선이 두텁고 표현이 담백하며 정중한 느낌을 주어 유교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결국 조선시대 석탑은 독창적인 양식을 창출하지 못한 채 아쉽게도 끝을 맺었다. 조선시대에는 결코 조탑활동이 활성화될 수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팽배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목탑이나 전탑, 모전석탑, 금동탑과 같은 빼어난 작품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탑하면 곧 석탑을 떠올리듯 우리 불탑의 역사 속에서 석탑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사찰의 중심 건물인 거대한 석조 건물로 세워지고,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석조물로서의 빼어난 조형미와 확고한 전통양식을 뿌리내렸으며, 시대를 거듭하면서 다양한 스타일과 장식으로 갈래를 뻗었기에 우리의 석탑은 어디서나 인상 깊게 시선을 끈다. 기개 서린 명탑이든 무던한 무명 탑이든 모두 역사와 문화의 성쇠를 반영하는 주인공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탑, 목탑, 석탑을 알아보았고. 특히 우리나라 석탑에 관한 시대적인 발달사까지 알아보았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전탑의 나라인 중국은 그들의 권위와 부를 과시하고. 백성들을 다스릴 목적으로 탑을 대단히 높게 만들었고. 이것을 통해 백성들 스스로를 낮추고 왕의 지배에 순응하도록 길들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목탑은 그들의 문화에서 볼수 있듯 중국처럼 크지 않고 화려한 외부 장식도
하지 않아 순후하게 보이지만, 사무라이의 칼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단히 차갑고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하다. 또한 좁은 공간에 대한 적응력을 알수도 있는 구조물로 되어있다는 것도 알수있었다.
그럼 우리의 석탑은 어떠한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고, 그 규모면 에서도 중국, 일본과는 비할 바가 못 되나 많은 인원수가 일시에 탑돌이를 할 수 있어 가장 많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즉 우리 전통문화 사상과도 어울리는 인간존중의 사상이 묻어 나온다. 또한 우리의 탑은 깨달은 부처가 온갖 세속의 장식을 거부하듯이 대단히 단순하며 꾸밈이 없다.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한 끝에 마침내 부다가야에서 정각에 이른 모습니다. 탑돌이의 공간은 외부에서 도는 개방형이라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대범한 마음이 엿보인다. 이는 마치 평소에는 선량하던 시민이 문이 닫히고 좁은 자동차 내부에 들어갔을 때 좁은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난폭해지는 우리의 모습과 비교되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낮은 천장에 좁은 문이 달려있는 폐쇄형의 자동차가 아니라, 개방형의 달구지를 타고 다닌다면 모두들 밝은 미소와 양보로써 우리의 마음도 더욱 훈훈해 질 것이다.
끝으로 우리 나라 석탑에 장인의 맥이 끊어 진 것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전통 석탑의 조형미를 뛰어 넘는 새로운 스타일의 석탑을 기대할 수도 없으며 정녕 옛것을 완벽하게 베끼기에도 힘겨운 실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조상들이 이루어 낸 석탑이 보여준 수준 높은 조형미를 되새기면서 모두가 관심을 갖고, 그 속에 있는 염원을 한번쯤 되새겨 볼 것을 기약해 본다
△ 참고문헌
이정수/박원출/조원영 - 테마가 있는 한국문화, 선인
백성광 - 문화유산과의 산책, 맑은소리
김현준 -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 효림
김정기 - 문화유산 상식 여행, 이토
장경호 - 한국의 전통문화, 문예
각종 탑 관련사진은 박물관 웹사이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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