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의 철학 혁명에서 맑스주의 철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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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근대철학의 문제설정

2.맑스의 철학적 혁명
(1)근대 철학의 전복
(2)맑스적 개념의 한계

3. 맑스주의 철학과 근대성
(1)맑스주의와 철학: 근대로의 회귀
(2)맑스주의 철학의 근대적 형태
(3)프롤테타리아트와 과학: 프롤레타리아적 진리를 향하여!
(4)프롤레타리아적 주체‘형성’의 문제: 전위와 대중의 변증법

4.맑스의 철학적 공간

본문내용

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신경망이다. 즉 당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주체의 의식이요 머리다. 반면 대중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몸체며, 머리가 작동할 수 있는 전제고, 머리가 해야할 일을 규정하는 기초다.
그런데 이 모델 자체는 의식적 주체라는 근대적 개념의 확장을 통해 성립된 것이다. 즉 당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주체의 (자기)의식이며,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이해를 투명하고 통일적으로 반영한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계급적 진리를 투명하게 체현하고 있으며,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중심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매인 대중들, 자신의 이해조차 인식할 수 없는 대중들은 과학적인 이 계급의식, 이 계급적 이성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입론은 그 자체만으론 "사회를 선진적 부분과 후진적 부분으로 분할하는" 근대적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 깨인 부분과 깨이지 못한 부분이란 계몽주의적 이분법. 그리고 여기서 이성적인 부분, 깨인 부분, 선진적인 부분의 중심성은 이미 처음부터 이분법 자체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위적 부분의 판단과 대중들의 판단이 서로 빗나갈 때 전자가 후자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아무 근거없는 부당한 것만은 아닌 셈이다. 이런 일들은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의 혁명과정에서 무수히 나타났으며, 그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대개 정치적 직관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의 신뢰를 저버린' 인민에 대해 비난을 퍼부은 동독공산당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를 진압한 동독공산당은, 당과 정부를 실망시킨 인민을 비난하면서 이제 다시 당의 신뢰를 획득할 것을 촉구하는 전단을 뿌렸다. 이를 두고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풍자한다. "[그 전단에는]...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 그것은 오직 2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씌여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 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해결방법>,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역시 전위로서의 이러한 자임에 근거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입론의 문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더욱 체계화된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조직들은 당이란 전위의 판단과 실천을 대중들에게 전달해주는 '전도벨트'(스탈린)로 정의되고, 대중운동 자체는 전위적 결정의 올바름을 확인하고 지지하기 위한 시위로 전환된다.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혁명적 실천'은 교육하는 자를 지지하는 동원운동으로 대체된 셈이다. 이 역시 근대적 맑스주의의 철학적-정치적 효과가 아닐까?
4.맑스의 철학적 공간
모든 이론에는 고유한 역사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그 이론이 아무리 일반적이고 초역사적인 형태로 정식화되었든 간에.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제시되는 철학적 사고조차 자신을 둘러싼 고유한 역사의 산물이다. 맑스주의 역시 그렇다. 아니, 스스로 역사적 개입을 지향하며, 거기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 맑스주의 이론이기에 맑스주의는 더욱더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으로서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것이 갖는 일반성을 무화함을 의미하는 것은 또한 아니다. 즉 이론이란 시절이 달라지면 강물에 흘러가듯 무효화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론이 역사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역사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노력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은 언제나 일반적 형태로 제시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이 양자 간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역사와 현실의 변화를 들어 이론 전체를 던져버리는 것에도, 반대로 이론의 일반성을 들어 변화와 무관하게 그것을 고집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역사를 통해서 기존 이론의 한계를 사고하고 새로운 사고의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고의 요소를 통해서 이론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배적인 형태의 맑스주의에서 당연시되었던 것들, 따라서 우리 역시 당연시했던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의문에 부치려고 했다. 그것은 당연시된 것들의 '근대성'을 통해서, 즉 맑스주의를 지배하고 있는 근대적 사고의 흔적들을 통해서 맑스주의의 한계를 사고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근대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맑스의 노력을 주목하려고 했다.
그러나 맑스가 만들어낸 탈근대적 사고의 이 공간은 곧바로 맑스의 시대를 지배한 역사 속에서, 특히 과학주의라는 이중의 장벽에 갇혀 축소되고 무화되었다. 역사는 이처럼 강력하게 새로운 사고와 이론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는 것이다! 근대적인 형태를 취해야만 했던 탈근대적 사고의 딜레마. 바로 이것이 맑스의 새로운 철학이 다시금 근대로 회귀토록 한 셈이다. 이것은 역사에 개입하려는 사상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근대의 장벽을 깨야하는 시기에, 적어도 그것을 깰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시기에 근대성에 안주함으로써 비극의 본 막(幕)은 시작된다. 근대적 형태의 맑스주의는 고착화되고 체계화되어 '정통'이란 공식성을 갖고 확산되었다. 맑스주의가 역사의 흔적을 지워버림으로써 역사에 개입하려 하는 순간,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혁명적 사고조차 역사적 흔적에 의해 지워버릴 수 있었던 용기있는 사상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맑스의 철학적 혁명이 창출한 탈근대적 사고의 공간에 들어가 공간 자체를 확장하고 그 속에서 맑스주의 자체와 역사까지도 다시 사고할 수 있는 이론적 요소를 찾아내는 작업은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맑스의 정신에 따라 근대적 한계를 넘어서 맑스주의를 밀고 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는 맑스의 철학적 혁명을 통해 마련된 지반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어쩌면 '다시 맑스로' 회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맑스가 제시한 어떤 '과학적' 명제들의 집합이 아니라, 다만 그가 마련한 '공간'일 뿐이란 점에서 단순한 회귀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근대 너머를 사고할 수 있는 그 공간만으로 근대성의 경계를 넘어서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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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04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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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68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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