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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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1. 결정적 패배, 대륙의 상실, 추락의 역사

2.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전한왕조와 국민당정권
2.1 국민당정권의 천하가 성립되는 과정과 배경
2.2 남경국민정부의 수립과 끝나지 않는 전쟁
2.3 이루지 못한 지방군벌의 타파와 국민당정권의 부담
2.4 군벌타파의 실패는 장개석의 패배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3. 항일전쟁기와 종전 이후의 경제
3.1 동남지방의 경제력과 장개석
3.2 중일전쟁과 국민당정권, 국부군의 경제적 시련
3.3 징세에 있어서의 파탄과 민심이반
3.4 인력 동원, 군량미 확보: 점증하는 경제적 부담
3.5 대기근과 저항
3.6 종전 이후: 전부면제책이 초래한 결과
3.7 재정, 경제의 파탄과 장개석의 패배

4. 항일전쟁과 국민정부군
4.1 국부군과 그들의 적들
4.2 중일전쟁의 개전과 국부군 전력
4.3 1938년에서 진주만 기습까지: 소모전과 국부군 전력의 약화
4.4 미일개전으로 인한 변화: 국부군 사기의 저하
4.5 1944년 대륙 타통 작전
4.6 국부군의 장성과 하급 장교, 그리고 최고 지도자

5. 국부군의 공산군과의 싸움
5.1 대륙의 상실: 미국의 책임?
5.2 장개석의 패전에 대한 반응과 분석
5.3 장강 도하 작전

6. 결론: 다시,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본문내용

개석이 사임하고 이종인이 총통대행으로 취임하는 등 급박한 전황과는 아랑곳 없이 복잡한 정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하작전 방어의 이점도, 공군의 존재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국부군 곳곳에 침입한 첩자는 장강 도하 작전에서 그 존재를 유감없이 과시했으니, 상해와 남경 중간에 위치한 강음이라는, 장강 도하를 저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새 중에서 하나를 방어하고 있던 사령관 대융광은 공산군이 일제히 장강을 도하하던 4월 20일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여 공산군의 도하를 허용
) 위의 책, p.197.
하였다. 이에 공산군은 강을 건너 불과 3일만인 4월 23일에 국민정부의 수도인 남경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민정부의 천하는 끝장나게 되었다.
결론
다시: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위와 같이 본서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결국 장개석이 패한 원인은, 미국 등 외세의 원조가 부족했기 때문은 전혀 아니며, 그렇다고 중국공산당이 탁월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국민당정권과 국부군 스스로의 무능함과 결점, 쇠락 때문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사실상 국민당정권은 중국공산당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위에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삼민주의의 껍데기만 남은 국민당은 도저히 혁명정당이라 할 수 없었고 게다가 집권과 통치의 방식은 전근대적이기 이를데 없었다. 국민당정권의 통치는 도저히 근대적인 중앙집권적 통치라고 할 수 없었다. 반면 중국공산당은 비록 내부에 구추백노선, 이립삼노선과 같은 좌경모험주의
) 모택동의 평가를 따르는 현재의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하다. 프롤레타리아트 노동자 계급에 기반한 도시혁명 노선은 본래의 맑스-레닌주의에 가장 충실한 것이므로 좌경모험주의라는 평가는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진독수의 트로츠키파 등과 모택동이 대립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훨씬 정치적으로 안정
) 1921년(창당)에서 1949년에 이르는 기간까지만을 한정해서 말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공산당 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인한 긴장과 분쟁, 숙청 등은 빈번했다. 팽덕회의 숙청, 임표의 반란 시도 등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자세한 내용은 리 즈수이 저, "모택동의 사생활" 참조.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내부 분쟁의 결말이 국민당의 경우처럼 궁극적으로는 늘 무력에 의해서만 결판이 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통치는 비록 안정적인 통치는 힘들었으나 최소한 국민당의 통치보다는 나았다.
) 중일전쟁 개전 직전의 중국공산당 치하의 "홍구"와 국민정부 치하의 "백구"의 통치상황에 대한 비교 고찰은 에드가 스노우 저, "중국의 붉은 별" 참조.
경제적으로 국민당정권의 풍요는 객관적으로 중국공산당을 능가했으나 이것은 국민당정권이 산업기반시설이 풍부한 동남지방을 중심으로 중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의 개전 이후 국민당정권도 사천성을 중심으로 하는 변방으로 내몰렸는데 이 때 국민당정권의 경제적 실책은 한없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하남성에서는 대기근을 야기하고 호북성과 호남성의 농민을 군량 조달의 부담에 짓눌리게 만들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재정은 안정되지 못했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연안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지역의, 인구밀도도 낮고 산업시설도 열악한 위치에 있었는데, 어떤 기준으로 따져봐도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정권의 통치영역이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제외해도 중국공산당이 본거지로 하는 영역보다는 부유하고 풍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소비에트 지구는 국민당정권의 통치 하에 있던 지역보다 군민의 사기가 월등했고, 소비에트의 화폐는 국민당정권의 법폐와는 달리 돈가치의 추락을 초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이에 관해서는 위의 책 참조.
군사적으로 보면, 객관적인 조건으로는 국민당정권의 국부군이 확실히 중국공산당의 홍군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었음은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다.
국민당정권은 중국공산당에 비해 열위에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중국공산당이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민당정권이 악수를 거듭하면서 스스로 무너져 간 것임은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다. 1927년에서 37년 사이에 불안하지만 중요한 평화의 시기가 있었는데 이 시기는 반장전쟁과 비적 초토 작전에 활용되어 군민은 한 차례도 휴식을 갖지 못했다. 1937년부터는 일본이 노도와 같이 침략해 오기 시작했고 국민당정권은 상해공방전과 장강 하류에서 중앙군이 대패하는 손실을 입었다. 이 손실로 인하여 단지 군사적으로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정치적 균형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국민당정권의 특수성에 기인한 비극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의 전투력은 전무함에 가까운 중앙군 사단들이 급조되어야 했고 이 병력들이 65만까지 증대되면서 군량미 부담을 아마도 더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병력들은 정예사단보다 국공내전 시기에 집단투항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결국 장기적으로 백해무익한 중앙군 사단들이 단지 중앙과 지방간의 정치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급조되었고, 그나마도 항일전 시기 아껴지기 위해서 전투에조차 내보내지지 않고, 전선에 시급히 보내져야 할 장비와 무기를 우선적으로 분배받았다. 지방군벌들은 이 모든 과정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차별받는 지방군들은 자신들이 장개석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 급조된 수많은 병력을 먹여 살려야 하는 농민들은 전부와 잡부금의 부담 속에서 신음해 갔고 대기근의 와중에서 죽어가면서 국민당정권에 실망했다. 이러고서도 1945년 종전 이후에 본격화된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參考文獻
로이드 E. 이스트만 저, 민두기 역,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지식산업사, 2000
요코야마 히로아키 저, 박종현 역, "중화민국사", 신서원, 2000
에드가 스노우 저, 홍수원·안양노·신홍범 역, "중국의 붉은 별", 두레출판사, 1995
리 즈수이 저, 손풍삼 역, "모택동의 사생활", 고려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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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05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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