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사] 농경민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목민 -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사마천의 사기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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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농경민의 눈에 비친 유목민: 두려움과 함께 탐구의 대상

2. 역사와 사기에서 언급된 유목민의 특징
2.1.1 도시 등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성곽이나 성채 또한 짓지 않는다.
2.1.2 비판
2.2.1 전투에 있어서 도주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2.2.2 비판
2.3.1 전투에 있어서의 탁월한 기동력
2.4.1 전공에 있어서 수급을 중요시한다.
2.4.2 비판
2.5.1 복속을 경멸한다.
2.5.2 비판
2.6.1 농경민에 대한 경계심리
2.6.2 비판

3. 소결

본문내용

을 기술하면서 조정의 처사에 대해서는 "강압"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부정적으로 서술한 점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 한의 입장에서 볼 때 흉노가 자신들의 문물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동화되기를 주저하는 것은 비난할 일은 아닌 것이다
) 사기의 "유경숙손통열전"에서 유경이 한 고조에게 진언하기를 "공주를 그들에게 보내고 물자를 그들에게 보내어 환심을 사서 결국 그들의 자손을 폐하의 신하로 만드십시오"라고 한 바는 있지만 그대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 "오랑캐가 중원의 문물을 받아 진보한다면 화이의 구분이 없어질 것"
) 이는 화이 관념이 더욱 짙어진 송대(宋代)에 이르러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인 소식이 상주한 것이다. 소식은 상주문에서 "고려의 사신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들이 경전을 구해가는 것도 막을 것"을 주청하면서 "이적이 중원의 문물을 얻어 진보한다면 화이의 구분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였다.
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테네의 황금기에 아테네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 당시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아테네의 문물에 많은 영향을 받은
) 헤로도토스의 생애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극히 적으나, 아테네에 상당히 오래 체류하면서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의 명사들과 교우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고 한다. 헤로도토스, 상게서, p.7.
헤로도토스로서는 타국의 문물에 대해서 극도의 배타성과 비개방성을 띄는 스키타이인의 습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것이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의 명사이며 7현인 중 한 명으로까지 거론되던 아나카르시스가 스키타이에 돌아가자마자 죽임을 당하게 된 것에 대하여 애틋한 마음을 담아 묘사하고 있으며, 스킬레스의 죽음에 관해서도 "비탄에 빠지게 되었다"라고 서술하며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테네인은 아니지만 통상국가이자 해운국가이던 아테네의 개방적 국풍의 영향을 받은 헤로도토스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일 뿐이다. 유목민이 농경민의 영향을 받아 그 강건한 기풍을 잃고 결국 쇠락하거나 멸족하게 된 사례는 흔하다고 할 수 있다
) 요를 건국하고 화북의 일부인 연운 16주를 통치하면서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았던 거란족이나, 청을 건국하고 명을 멸망시켜 중국 전체를 통치하였던 만주족의 경우 이제는 그 후예를 찾기조차 쉽지 않다.
. 유목민의 자기방어적 본능으로 농경문화의 문물의 영향을 받는 것에 경계의 심리를 갖는 것은 유목민의 입장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화이의 구분 운운하며 문물을 전달하는 것 자체를 우려하는 것도 바람직한 관점이 아니겠으나, 개방적인 생각에 젖어 농경민과 유목민간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를 망각한채 유목민의 농경문화에 대한 경계심을 배타적인 자세로 비판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3. 소결
이상에서 초기 유목민에 대하여 고찰한 농경민측의 대표적인 사서로서 서방에서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동방에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선택하고, 이를 통하여 유목민인 스키타이와 흉노의 특징과 이 특징을 바라본 농경민측의 관점을 소개하고, 비판을 가할만한 지점이 있을 경우 이를 비판하였다
) 유목민인 스키타이나 흉노가 그들 스스로에 관하여 기술한 사료가 있었다면 더 없이 좋았을 것이나, 스키타이나 흉노는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쉬울 따름이다. 참고로 후대의 유목민인 거란이나 여진의 경우에는 중국에 침입하여 요, 금의 왕조를 건국한 후에는 각각 거란문자와 여진문자를 제정하였기 때문에 그 해독의 난해함은 별론으로 하고, 일단 문자로 된 사료가 남아 있기는 한 상황이다.
.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사마천의 사기가 공통적으로 지적한 유목민의 특성 중 상당수는 이들 이 농경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유목민의 특성에 대한 몰이해나 편견, 또는 의도적으로 유목민의 야만성이나 야수성, 난폭성을 과장하려 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 각각 동방과 서방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 그리고 필자인 헤로도토스나 사마천이 처한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양 사서 사이에서도 유목민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다.
주 34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목민이 스스로에 관하여 기술한 사료가 초기 유목민인 스키타이나 흉노의 경우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농경민측의 관점에서 기술된 사료에만 입각하여 유목민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한 부분을 살핌에 있어서는 비판적 고찰이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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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06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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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69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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