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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혁명의 말기 과정에서 보여준 타락상을 지적할 수 있으며 혁명전개 과정에 있어서의 만연된 행위는 혁명 자체로서도 불행한 일이되고 교세나 교리에 대한 민중적 이해에도 불행한 결과를 남기게 된다. 둘째 민중적 차원에서 볼 때 나타나는 또 다른 불행은 그들이 종교적 편견이라고 하는 역기능으로 인하여 남 · 북접의 분열이다. 이것은 정확히는 내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문제는 동학 종단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북군과 민란 성격의 남군 사이에 벌어진 종교적 배격심과 주도권 다툼에서 였다. 이러한 지도층의 분열은 갑오혁명 실패로 이끈 커다란 원인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외재적으로 여타의 계층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지지도나 호응도의 문제인데 이 점에 있어서는 단적으로 말해 범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유생들과의 갈등이었다.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는 유생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것이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는 일차적 조건이었다. 갑오혁명의 한 추진력으로서의 동학사상이 당초 유생들의 눈에는 邪學으로 비쳤고 갑오혁명의 민란적 요소가 상층 구조에 대한 신분적 도전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유생들과의 제휴에 실패한 것이다. 또한 하나의 봉기가 혁명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요소는 혁명군의 사회적 기동성인데 이문제를 대행해 줄 수 있는 신분이 보부상이 있는데 이들은 그들의 성격이 관·민관계에 있어서 관(官)쪽에 편향할 수 밖에 없었다. 동학군은 지식이나 전략의 면에 있어서도 유대를 맺는데 실패하였다.
二十. 근대화에의 기여도
조선조 후는 내재적인 모순과 지정학적인 궁벽성으로 인하여 근대화에 대해 매우 어두운 실정이었다. 개화사라고 하는 시각에 비추어 조선조 후기를 살펴본다면 개화를 위한 몇가지의 인자가 작용하는데 하나의 사상 체계를 이룩한 실학, 지리적으로 淸朝의 자강운동을 둘러싼 개명문화,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서구 문물의 도입, 일본의 명치유신의 영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류대치-이동원-김옥균으로 이어지는 불교사상 등이 이에 속한다. 지적한 요인들이 외래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개화는 타율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는 우리의 사회가 통과하여 온 문화적인 변천은 어디까지나 우리 사회가 독자적으로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격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중요시한다면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의 외래적 성격이 근대화의 의미마저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갑오혁명이 근대화에 기여한 바를 정치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갑오혁명이 실패하였다고는 하지만 완고수구하던 위정자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권위주의적인 정치 의식에서 반성하고 자각하게 한 데에 갑오혁명의 정치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특히 계급을 타파하려던 의식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구조란 지리적인 구조와 계층적인 구조와 제도적인 구조의 셋으로 나뉘어지는데 사회의 근대화란 지역 사회를 근대화하는 것으로 갑오혁명은 사회의 계급 차별 제도를 타파하려고 시도 하였으며 조세와 토지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재산적 의미와 민란의 요구의 신분적 해방을 가미하는 것은 종교인데 갑오혁명의 경우에 있어서는 동학사상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했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갑오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천도교라는 공식 종료집단으로 긍정적으로 발전한 천도교의 활약에서 찾을 수가 있다. 천도교에서는 여성의 교육에 힘을 쓰는 한편 일반 교육에 이바지하였고 인쇄소를 경영함으로써 출판 활동을 통하여 천도교 자체의 교세를 확장하였고 대중을 위한 문화 사업에도 이바지하였다. 위의 세가지 측면에 있어서의 근대화를 위한 기여도가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곧 갑오경장이었다.
갑오혁명이 한국 근대화에 끼친 역기능을 알아 보면, 서구 문물에 대한 수용 과정에서 보인 그들의 배타적 태도는 한국 근대화의 지연을 가져왔고 그 예로서 그들은 패정개혁14개종 중에서 전보 등의 통신제도가 극히 패가 많으므로 이를 철파해야 함을 극구 주장하였으며 김옥균 등의 개화 운동을 망국 행위로 비판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을 볼 때 개화에의 역행은 부인할 수가 없는데 선구적인 지식인들이 이에 참여하지 않은 데에서 온 비극이며, 여기에 한국 근대화에 대한 갑오혁명의 기여도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갑오혁명의 개화사적의미를 거론함에 있어 동학운동과 갑오혁명이라고 하는 일련의 근대화 운동에 있어서 동학사상은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근대화 그 자체에 있어서 갑오혁명은 순기능과 역기능이라고 하는 양면성이 있으며 이는 종교 그 자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근대화란 종교의 세속화를 요구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종교의 순수성은 감소되고 그 자체로서 그 본질에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며 종교적 가치나 전망은 이미 계획된 사회변화의 대상이나 목표를 조망해 주고 그 것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기 때문이다.
二十一. 맺은말
글을 마침에 있어 강조하고자하는 세가지점이있다.
첫째로, 우리는 한국의 사상사를 봄에 있어서 서구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동학사상과 갑오혁명이 가지는 가치는 종래 서구적 사유 방식에 따라서 비하와 냉대만을 받아온 한국의 전통 사상과 토속 신앙이 의식화하여 민족사적 차원으로 승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동학과 같은 토속 신앙이 민족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종래의 관념을 전면적으로 반영하는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동학 사상과 갑오혁명의 발생 · 정착 · 소멸의 과정을 정대위의 분석모델로 이해하면 유익할 것이다. 그의 분석의 모델로서 첫째는 교모, 둘째로는 반죽, 셋째로는 기온을 지적하였는데 이에 동학사상과 갑오혁명을 분석한다면 홀씨와 텃밭이 있었고 견디기 어려운 시대 상황이 있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패전의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동학과 갑오혁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오랜 봉건적 사회속에서 개벽을 주장했고 보국안민을 위한 투쟁에 있다. 갑오혁명과 같은 값진 사상과 운동이 다시는 외세에 의하여 또는 봉건적 반동 세력에 의하여 궤멸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 동학의 연구를 강조한다.
二十. 근대화에의 기여도
조선조 후는 내재적인 모순과 지정학적인 궁벽성으로 인하여 근대화에 대해 매우 어두운 실정이었다. 개화사라고 하는 시각에 비추어 조선조 후기를 살펴본다면 개화를 위한 몇가지의 인자가 작용하는데 하나의 사상 체계를 이룩한 실학, 지리적으로 淸朝의 자강운동을 둘러싼 개명문화,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서구 문물의 도입, 일본의 명치유신의 영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류대치-이동원-김옥균으로 이어지는 불교사상 등이 이에 속한다. 지적한 요인들이 외래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개화는 타율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는 우리의 사회가 통과하여 온 문화적인 변천은 어디까지나 우리 사회가 독자적으로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격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중요시한다면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의 외래적 성격이 근대화의 의미마저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갑오혁명이 근대화에 기여한 바를 정치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갑오혁명이 실패하였다고는 하지만 완고수구하던 위정자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권위주의적인 정치 의식에서 반성하고 자각하게 한 데에 갑오혁명의 정치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특히 계급을 타파하려던 의식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구조란 지리적인 구조와 계층적인 구조와 제도적인 구조의 셋으로 나뉘어지는데 사회의 근대화란 지역 사회를 근대화하는 것으로 갑오혁명은 사회의 계급 차별 제도를 타파하려고 시도 하였으며 조세와 토지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재산적 의미와 민란의 요구의 신분적 해방을 가미하는 것은 종교인데 갑오혁명의 경우에 있어서는 동학사상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했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갑오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천도교라는 공식 종료집단으로 긍정적으로 발전한 천도교의 활약에서 찾을 수가 있다. 천도교에서는 여성의 교육에 힘을 쓰는 한편 일반 교육에 이바지하였고 인쇄소를 경영함으로써 출판 활동을 통하여 천도교 자체의 교세를 확장하였고 대중을 위한 문화 사업에도 이바지하였다. 위의 세가지 측면에 있어서의 근대화를 위한 기여도가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곧 갑오경장이었다.
갑오혁명이 한국 근대화에 끼친 역기능을 알아 보면, 서구 문물에 대한 수용 과정에서 보인 그들의 배타적 태도는 한국 근대화의 지연을 가져왔고 그 예로서 그들은 패정개혁14개종 중에서 전보 등의 통신제도가 극히 패가 많으므로 이를 철파해야 함을 극구 주장하였으며 김옥균 등의 개화 운동을 망국 행위로 비판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을 볼 때 개화에의 역행은 부인할 수가 없는데 선구적인 지식인들이 이에 참여하지 않은 데에서 온 비극이며, 여기에 한국 근대화에 대한 갑오혁명의 기여도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갑오혁명의 개화사적의미를 거론함에 있어 동학운동과 갑오혁명이라고 하는 일련의 근대화 운동에 있어서 동학사상은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근대화 그 자체에 있어서 갑오혁명은 순기능과 역기능이라고 하는 양면성이 있으며 이는 종교 그 자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근대화란 종교의 세속화를 요구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종교의 순수성은 감소되고 그 자체로서 그 본질에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며 종교적 가치나 전망은 이미 계획된 사회변화의 대상이나 목표를 조망해 주고 그 것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기 때문이다.
二十一. 맺은말
글을 마침에 있어 강조하고자하는 세가지점이있다.
첫째로, 우리는 한국의 사상사를 봄에 있어서 서구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동학사상과 갑오혁명이 가지는 가치는 종래 서구적 사유 방식에 따라서 비하와 냉대만을 받아온 한국의 전통 사상과 토속 신앙이 의식화하여 민족사적 차원으로 승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동학과 같은 토속 신앙이 민족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종래의 관념을 전면적으로 반영하는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동학 사상과 갑오혁명의 발생 · 정착 · 소멸의 과정을 정대위의 분석모델로 이해하면 유익할 것이다. 그의 분석의 모델로서 첫째는 교모, 둘째로는 반죽, 셋째로는 기온을 지적하였는데 이에 동학사상과 갑오혁명을 분석한다면 홀씨와 텃밭이 있었고 견디기 어려운 시대 상황이 있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패전의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동학과 갑오혁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오랜 봉건적 사회속에서 개벽을 주장했고 보국안민을 위한 투쟁에 있다. 갑오혁명과 같은 값진 사상과 운동이 다시는 외세에 의하여 또는 봉건적 반동 세력에 의하여 궤멸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 동학의 연구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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