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등소평의 일생과 집안내력, 가정 생활, 취미생활
2. 등소평의 일생과 집안내력, 가정 생활, 취미생활
본문내용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그녀는 다시 과학위원회 과학기술 정책국 부국장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남편 장굉은 국가 과학위원회 과학기술개발국 국장이다.
지난 수년 동안 등소평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자녀는 셋째 딸 등용이다. 그녀는 등소평의 개인 비서이면서 등소평의 귀와 입 역할을 하였으며, 등소평을 대신하여 정보를 듣고 지시를 하달하였다. 아명이 모모이기도 한 등용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명랑하고 영리하여 부모로부터 각별한 사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혁시기에 북경사범대학 부속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섬서성 부현으로 추방되었다. 당시에 그녀는 갖은 냉대를 받았으나 현재의 남편 하평만은 그녀를 잘 대해 주었으며,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등소평이 두 번째 복위되었을 때 등용은 북경의과대학에 입학하였으며, 77년 졸업한 후에는 해방군 총정치부로 발령 받았다가 79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4년 후에 귀국하여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정책연구실 부주임에 임명되었다. 88년 제6기 전국 부녀회의 집행위원 선거에서 그녀는 15명의 낙선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다. 등용은 등소평의 개인 비서를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그녀의 남편 하평은 해방군 최대의 무기회사인 보리공사(保利公司) 사장을 역임하였다. 최근 그녀는 ≪나의 아버지 등소평 - 문혁세월≫이란 책을 출판하여 국내외의 많은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④ 취미 생활 : 등소평은 "브리지"를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브리지 고수이기도 하였다. 그의 브리지 기술은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세계 브리지 대회에서 여러번 우승한 재미 화교 양소연(楊小燕)도 "중국 지도자의 브리지 기술은 대단히 높다. 등소평은 브리지의 고수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다소 의례적인 칭찬으로도 볼 수 있지만 등소평이 81년에 "브리지 세계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등소평의 브리지 기술은 국제 브리지계의 인정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등소평의 친구들은 고위 간부였는데 그들은 매주 한 두 차례 만나 브리지를 즐겼으며, 게임이 끝난 후에 등소평은 항상 브리지 친구들과 함께 국가대사를 의논하면서 주로 그들의 견해를 듣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브리지 외에도 등소평은 열렬한 축구팬이기도 하였다. 등소평의 막내딸 등용의 말에 의하면 등소평은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하였는데, 당시에 그는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던 외투를 팔아 표를 샀다고 한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가 된 후에 그는 축구경기를 관람하기가 훨씬 쉬웠다. 90년 멕시코 월드컵 때 등소평은 현지에서 중계되는 경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보았으며, 경기 내용을 메모해 두었다가 경기가 끝난 후에 등박방과 함께 토론하기도 하였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 등소평은 이미 90세의 고령이었지만, 등용의 말에 의하면 그때에도 등소평은 TV 생중계를 통해 50경기를 보았으며,(대부분 북경시간으로 새벽 1시 전후에 시작되었다.) 나머지 두 경기는 녹화테이프를 보았다고 한다. 90여세의 노인이 밤을 새워가면서 축구경기를 한달 동안이나 보았다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로 다소 과장된 듯 하지만, ≪영문중국일보≫는 90년에 등소평의 월드컵 시청 사실을 증명하면서 중국 축구가 하루 빨리 세계 수준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전한 바 있다.
등소평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폭넓었다. 그는 축구 외에 탁구, 농구, 수영 등도 대단히 좋아하였다. 그는 "내가 건강한 것은 아마도 수영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하였다. 80년대 후기에 그는 아내 탁림, 딸, 외손자 등과 함께 대련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매일 90분간 해수욕을 즐겼다.
지난 수년 동안 등소평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자녀는 셋째 딸 등용이다. 그녀는 등소평의 개인 비서이면서 등소평의 귀와 입 역할을 하였으며, 등소평을 대신하여 정보를 듣고 지시를 하달하였다. 아명이 모모이기도 한 등용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명랑하고 영리하여 부모로부터 각별한 사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혁시기에 북경사범대학 부속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섬서성 부현으로 추방되었다. 당시에 그녀는 갖은 냉대를 받았으나 현재의 남편 하평만은 그녀를 잘 대해 주었으며,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등소평이 두 번째 복위되었을 때 등용은 북경의과대학에 입학하였으며, 77년 졸업한 후에는 해방군 총정치부로 발령 받았다가 79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4년 후에 귀국하여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정책연구실 부주임에 임명되었다. 88년 제6기 전국 부녀회의 집행위원 선거에서 그녀는 15명의 낙선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다. 등용은 등소평의 개인 비서를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그녀의 남편 하평은 해방군 최대의 무기회사인 보리공사(保利公司) 사장을 역임하였다. 최근 그녀는 ≪나의 아버지 등소평 - 문혁세월≫이란 책을 출판하여 국내외의 많은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④ 취미 생활 : 등소평은 "브리지"를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브리지 고수이기도 하였다. 그의 브리지 기술은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세계 브리지 대회에서 여러번 우승한 재미 화교 양소연(楊小燕)도 "중국 지도자의 브리지 기술은 대단히 높다. 등소평은 브리지의 고수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다소 의례적인 칭찬으로도 볼 수 있지만 등소평이 81년에 "브리지 세계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등소평의 브리지 기술은 국제 브리지계의 인정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등소평의 친구들은 고위 간부였는데 그들은 매주 한 두 차례 만나 브리지를 즐겼으며, 게임이 끝난 후에 등소평은 항상 브리지 친구들과 함께 국가대사를 의논하면서 주로 그들의 견해를 듣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브리지 외에도 등소평은 열렬한 축구팬이기도 하였다. 등소평의 막내딸 등용의 말에 의하면 등소평은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하였는데, 당시에 그는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던 외투를 팔아 표를 샀다고 한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가 된 후에 그는 축구경기를 관람하기가 훨씬 쉬웠다. 90년 멕시코 월드컵 때 등소평은 현지에서 중계되는 경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보았으며, 경기 내용을 메모해 두었다가 경기가 끝난 후에 등박방과 함께 토론하기도 하였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 등소평은 이미 90세의 고령이었지만, 등용의 말에 의하면 그때에도 등소평은 TV 생중계를 통해 50경기를 보았으며,(대부분 북경시간으로 새벽 1시 전후에 시작되었다.) 나머지 두 경기는 녹화테이프를 보았다고 한다. 90여세의 노인이 밤을 새워가면서 축구경기를 한달 동안이나 보았다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로 다소 과장된 듯 하지만, ≪영문중국일보≫는 90년에 등소평의 월드컵 시청 사실을 증명하면서 중국 축구가 하루 빨리 세계 수준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전한 바 있다.
등소평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폭넓었다. 그는 축구 외에 탁구, 농구, 수영 등도 대단히 좋아하였다. 그는 "내가 건강한 것은 아마도 수영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하였다. 80년대 후기에 그는 아내 탁림, 딸, 외손자 등과 함께 대련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매일 90분간 해수욕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