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제 1 교시 : 식민사관과 민족주의사관 ■
■ 제 2 교시 : 고대국가의 형성과 이해 ■
■ 제 3교시 : 금석문을 통한 삼국시대의 조망 ■
■ 제 4 교시 : 불교의 전래 (원효와 의상 vs 비의상계) ■
■ 제 5 교시 : 사원과 불상 ■
■ 제 6 교시 : 성리학 (性理學) ■
■ 제 7 교시 : 조선시대의 궁궐 ■
■ 제 2 교시 : 고대국가의 형성과 이해 ■
■ 제 3교시 : 금석문을 통한 삼국시대의 조망 ■
■ 제 4 교시 : 불교의 전래 (원효와 의상 vs 비의상계) ■
■ 제 5 교시 : 사원과 불상 ■
■ 제 6 교시 : 성리학 (性理學) ■
■ 제 7 교시 : 조선시대의 궁궐 ■
본문내용
에 적합하였으므로, 관료들은 성리학을 통해 불교의 폐단을 제거하고 법질서와 예 질서확립·민생구제책 등을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교는, 우주·인성·자연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탐구가 부족했다. 따라서 천명·천리·태극논리와 이·기·음양 논리 등의 형이상학적 부분을 집중 탐구하였으며, 이러한 심성탐구의 면모는 중국과 차별화 된 우리 나라의 발전양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도입당시의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은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함께 갖는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개
조선시대 초의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정도전과 권근에 의해 전개된다. 정도전은 성리학의 철학적·윤리적 측면을 정치적으로 수용하여 불교와 도교의 사회적 폐단을 극복하려 하였으며, 권근은 성리학의 심성연구를 통하여 성리학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는 16세기 이황과 이이의 이기해석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15세기는 의리가 중시되는 '도학의 시대'로서, 도덕적 성향이 강조되었다. 특히, 조광조는 "율신과 수기를 통하여 공사의리를 지킬 수 있다"는 '공사의리'를 강조하며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앞장섰다. 이는 중종반정으로써 막을 내린,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며 주장한 것으로서, 덕과 예로서 다스리는 이상적인 왕도(王道) 구현을 추구한 것이다.
16·17세기는 '예학의 시대'로써, 이황과 이이에 의해 이론탐구가 본격화되고, 성리학은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황은, '사단칠정론'에서 4단(인,의,예,지)이란 理로부터, 7정(희,노,애,구,애,오,욕)이란 氣로부터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제 7 교시 : 조선시대의 궁궐
조선시대의 궁궐은 조선전기의 정궁인 경복궁과, 조선후기의 이궁으로써 창덕궁·창경궁이 있고, 경운궁은 대한제국 시대의 것으로 고종이 아관파천후 복귀한 행궁이다. 창덕궁의 보조궁궐인 창경궁은, 왕비·대비 등 성종대의 궁궐내 여자들의 주거공간으로써 지어졌으며, 따라서 궐내각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궁궐들의 건물배치는 공통적으로 '전조후침'의 구조를 지니며, 바깥의 조정을 뜻하는 '외조'와 정치를 논의하는 '치조', 그리고 침소인 '연조'로 그 기능이 나뉘어진다. 예를 들어, 경복궁은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그 밖에 궁궐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조정에 있는 '3도'와 '답도', 그리고 '품계석', 왕가를 상징하는 월대 위의 '9정', 그리고 추녀마루 위의 '잡상', 용상의 '삼곡병·일월오봉병·닫집' 등이 있다. 궁궐들은 또한, 풍수지리사상의 영향으로 배산임수에 위치하며, 음양오행사상·천지인사상·천원지방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데, 흥인지문(仁)·돈의문(義)·숭례문(禮)·숙정문(智)·보신각(信)을 비롯한 각 건물들의 이름과, 월대에 배치된 서수(12지상), 일월오봉병, 연못과 섬의 모양, 누각의 기둥모양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고종5년에 복원하였으나, 구한말 일본의 침략과 수탈 속에 또다시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 일제는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내고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으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까지 헐어내었다. 현재 복원되어 있는 광화문은 조선총독부가 바라보던 남산방향으로 세워진 것으로써, 원래의 모습과는 뒤틀린 모습이다. 일제는 궁궐내의 파괴한 건물터에 마치 무덤처럼 잔디를 깔아놓았고, 뜰 가운데에 나무를 심어 빈곤할 곤(困)자를 연상케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치하에서 궁내로 옮겨진 탑과 부도는 유교의 상징인 경복궁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었다. 창덕궁의 희정당과 대조전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는, 경복궁의 교태전과 강녕전 등의 많은 건물을 철거해 이건하기도 하였으며, 이렇게 복원된 희정당은 왕의 침소임에도 불구하고 용마루를 올리는 등 형태가 왜곡되었다. 왕과 왕비의 침소인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창경궁의 통명전 등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창덕궁의 진선문과 인정전의 용마루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은 일본천황아래 족속 되어있는 하나의 가신이다"라는 치욕적인 의미의 오얏꽃(李花)문양이 용마루에 붙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중요한 회의장소로 쓰이던 '빈청'을 '어차고'로 개조시켜 놓았다. 창경궁에는 동·식물원을 들여놓고, '창경원'이라 부르며 놀이공원으로 삼았으며, 경운궁은 '물러난 왕'에게 붙이는 칭호인 '덕수'를 붙여 덕수궁이라 개칭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철저한 수탈행위로써, 현재의 경복궁은 제 모습의 약10%, 창덕궁은 약20%만을 남기고 있어 복원이 절실히 요구된다. 경운궁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곳으로써, 여러나라의 공사관이 들어옴으로인해 축소되고 왜곡된 모습이다. 특히, 서양식건물로 된 정관원과 석조전의 마당에는 분수가 설치되어 있어, 당시의 자연관을 거스르는 모습이다.
이처럼 외세에 의해 짓밟힌 우리의 궁궐에서는 당시의 중화사상 속에서도 우리민족의 자주의식을 나타내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 위에는 '7조룡'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황제국을 자칭하는 것으로써 원래 제후국은 '5조룡'만을 그릴 수 있었다. 또한, 창덕궁의 인정전에는, 중국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색으로 문틀을 칠해 놓아 중국과 대등함을 알리려 하였다. 경복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는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 없는 이유는 제후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은 경운궁에 하늘께 제사를 지내는 곳인 원구단을 세우고 황제국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교는, 우주·인성·자연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탐구가 부족했다. 따라서 천명·천리·태극논리와 이·기·음양 논리 등의 형이상학적 부분을 집중 탐구하였으며, 이러한 심성탐구의 면모는 중국과 차별화 된 우리 나라의 발전양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도입당시의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은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함께 갖는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개
조선시대 초의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정도전과 권근에 의해 전개된다. 정도전은 성리학의 철학적·윤리적 측면을 정치적으로 수용하여 불교와 도교의 사회적 폐단을 극복하려 하였으며, 권근은 성리학의 심성연구를 통하여 성리학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는 16세기 이황과 이이의 이기해석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15세기는 의리가 중시되는 '도학의 시대'로서, 도덕적 성향이 강조되었다. 특히, 조광조는 "율신과 수기를 통하여 공사의리를 지킬 수 있다"는 '공사의리'를 강조하며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앞장섰다. 이는 중종반정으로써 막을 내린,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며 주장한 것으로서, 덕과 예로서 다스리는 이상적인 왕도(王道) 구현을 추구한 것이다.
16·17세기는 '예학의 시대'로써, 이황과 이이에 의해 이론탐구가 본격화되고, 성리학은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황은, '사단칠정론'에서 4단(인,의,예,지)이란 理로부터, 7정(희,노,애,구,애,오,욕)이란 氣로부터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제 7 교시 : 조선시대의 궁궐
조선시대의 궁궐은 조선전기의 정궁인 경복궁과, 조선후기의 이궁으로써 창덕궁·창경궁이 있고, 경운궁은 대한제국 시대의 것으로 고종이 아관파천후 복귀한 행궁이다. 창덕궁의 보조궁궐인 창경궁은, 왕비·대비 등 성종대의 궁궐내 여자들의 주거공간으로써 지어졌으며, 따라서 궐내각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궁궐들의 건물배치는 공통적으로 '전조후침'의 구조를 지니며, 바깥의 조정을 뜻하는 '외조'와 정치를 논의하는 '치조', 그리고 침소인 '연조'로 그 기능이 나뉘어진다. 예를 들어, 경복궁은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그 밖에 궁궐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조정에 있는 '3도'와 '답도', 그리고 '품계석', 왕가를 상징하는 월대 위의 '9정', 그리고 추녀마루 위의 '잡상', 용상의 '삼곡병·일월오봉병·닫집' 등이 있다. 궁궐들은 또한, 풍수지리사상의 영향으로 배산임수에 위치하며, 음양오행사상·천지인사상·천원지방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데, 흥인지문(仁)·돈의문(義)·숭례문(禮)·숙정문(智)·보신각(信)을 비롯한 각 건물들의 이름과, 월대에 배치된 서수(12지상), 일월오봉병, 연못과 섬의 모양, 누각의 기둥모양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고종5년에 복원하였으나, 구한말 일본의 침략과 수탈 속에 또다시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 일제는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내고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으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까지 헐어내었다. 현재 복원되어 있는 광화문은 조선총독부가 바라보던 남산방향으로 세워진 것으로써, 원래의 모습과는 뒤틀린 모습이다. 일제는 궁궐내의 파괴한 건물터에 마치 무덤처럼 잔디를 깔아놓았고, 뜰 가운데에 나무를 심어 빈곤할 곤(困)자를 연상케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치하에서 궁내로 옮겨진 탑과 부도는 유교의 상징인 경복궁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었다. 창덕궁의 희정당과 대조전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는, 경복궁의 교태전과 강녕전 등의 많은 건물을 철거해 이건하기도 하였으며, 이렇게 복원된 희정당은 왕의 침소임에도 불구하고 용마루를 올리는 등 형태가 왜곡되었다. 왕과 왕비의 침소인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창경궁의 통명전 등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창덕궁의 진선문과 인정전의 용마루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은 일본천황아래 족속 되어있는 하나의 가신이다"라는 치욕적인 의미의 오얏꽃(李花)문양이 용마루에 붙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중요한 회의장소로 쓰이던 '빈청'을 '어차고'로 개조시켜 놓았다. 창경궁에는 동·식물원을 들여놓고, '창경원'이라 부르며 놀이공원으로 삼았으며, 경운궁은 '물러난 왕'에게 붙이는 칭호인 '덕수'를 붙여 덕수궁이라 개칭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철저한 수탈행위로써, 현재의 경복궁은 제 모습의 약10%, 창덕궁은 약20%만을 남기고 있어 복원이 절실히 요구된다. 경운궁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곳으로써, 여러나라의 공사관이 들어옴으로인해 축소되고 왜곡된 모습이다. 특히, 서양식건물로 된 정관원과 석조전의 마당에는 분수가 설치되어 있어, 당시의 자연관을 거스르는 모습이다.
이처럼 외세에 의해 짓밟힌 우리의 궁궐에서는 당시의 중화사상 속에서도 우리민족의 자주의식을 나타내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 위에는 '7조룡'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황제국을 자칭하는 것으로써 원래 제후국은 '5조룡'만을 그릴 수 있었다. 또한, 창덕궁의 인정전에는, 중국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색으로 문틀을 칠해 놓아 중국과 대등함을 알리려 하였다. 경복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는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 없는 이유는 제후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은 경운궁에 하늘께 제사를 지내는 곳인 원구단을 세우고 황제국으로 칭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