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지주제
토지조사사업과 관련한 통감부 정책
1. 토지소유권 증명에 관한 법령의 정비
2. 황실재정 정리와 국유지 창출
3. 징세제도의 개혁
Ⅱ. 토지조사 사업의 실시경과
1. 사업의 입안과정과 토지조사령
2. 소유권조사와 등기제도이 시행
3.분쟁지조사
4. 지가조사와 지세부과방식의 변화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식민지지주제의 성립
토지조사사업과 관련한 통감부 정책
1. 토지소유권 증명에 관한 법령의 정비
2. 황실재정 정리와 국유지 창출
3. 징세제도의 개혁
Ⅱ. 토지조사 사업의 실시경과
1. 사업의 입안과정과 토지조사령
2. 소유권조사와 등기제도이 시행
3.분쟁지조사
4. 지가조사와 지세부과방식의 변화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식민지지주제의 성립
본문내용
1918년 지세령 개정에 의해 과세표준으로 이용되고 종래의 결부제에 의한 지세부과방식 대신 지가의 1.3퍼센트에 해당하는 세금을 납부하도록 제도가 바뀐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세징수제도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합병초기에는 결수연명부에 의해 지세를 부과하였고 1914년 지세령을 제정한 뒤에도 이런한 관계는 계속 되었고 1915년 ‘지세령시행규칙’을 개정하면서 토지대장이 있는 군은 지세명기장(地稅名奇帳)을 작성하고 결수연명부를 폐지하였으나, 다른 군은 결수연명부를 계속 사용하였다.
3.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사업이 완료된 결과로서 첫째, 1차 계획 수립당시 예정했던 276만여 정보, 1,378만여 필을 훨씬 넘는 487만여 정보, 1,911만여필의 토지가 조사되었다. 이는 1910년 말의 경지면적과 비교하면 경지 전체적으로 80%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면적의 증가는 은결이나 산지개간의 조사를 통하였다기보다는 1910년 말의 경지면적은 양안상의 결수에 의해 산출 되었는데 이 결수 산정이 실제 면적에 비해 낮에 이루어지고 과소 평과 되었기에 사업을 통해 급증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었다.
둘째, 경지면적의 증가는 당연히 지세부담에 편차를 가져왔다. 개정 전후 지세액의 증감을 전체적으로 볼 때 전라도와 함경도의 경우는 오히려 지세액이 감소하였고 경기·강원·경상도의 경우는 급증하였다. 이처럼 지역간의 격차가 나타나는 것은 과세방법이 결부법에 의한 것에서 지가에 의한 것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막대한 양의 국유지가 창출되었다. 사업을 통해 종래 소유권이 설정되지 않은 채 조선 농민에게 잠재적 소유지로 존재하던 미간지나 삼림·산야 등에 대하여, 민유지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뚜렷하지 않는 한 모두 국유지로 편입시켰다. 이는 조선의 관행은 전·답·대지의 경우에 한하여 그 소유권 귀속이 분명하고 기타의 토지의 소유권이 모호한 채 남아 있던 것을 사업을 통하여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지가 확정되고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 토지는 국유로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사업에서 작성된 토지대장에 기초하여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는 등기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일본 자본의 입장에서는 토지거래를 확대할 여건이 마련된 셈이었다.
다섯째, 사업을 통하여 새로운 행정조직의 관할구역이 분명해졌다. 1913년 일제는 군·면 통폐합으로 행정구역의 재편을 실시하였다. 여기서 나타난 새로운 행정조직은 종래보다 규모를 축소시키고 이 조직을 통하여 지방행정을 장악함으로써 식민지통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게 되었다.
4.식민지지주제의 성립
토지조사 과정에서 확립된 새로운 토지제도와 지세제도는 식민통치의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등기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전토지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국가적 토지소유는 마침내 철폐되었고 이러한 토지제도의 변화 속에서 기존에 일본인들의 토지소유는 다른 조선인 토지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이고 절대적인 안정성을 부여받았다. 지세제도의 확립은 식민지재정에 안정성을 부여하고 소유권조사 결과 창출된 국유지로부터 역둔토 수입도 재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사업이 완료될 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민이었다. 농촌에서 지주-소작관계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식민지지주제라고도 표현 되었는데 이러한 생산관계는 1910-20년에 더욱 강화되었다. 새로운 토지제도 아래에서 토지의 상품화는 이전보다 훨씬 본격화될 경향을 지니고 있었고 1910년대 후반이후 상품화의 진행과 가중되는 조세부담으로 몰락해가는 영세농을 소작농으로 흡수하면서 지주경영을 확대해갔고 토지조사사업은 이러한 과정을 매개로 하여 식민지지주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3.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사업이 완료된 결과로서 첫째, 1차 계획 수립당시 예정했던 276만여 정보, 1,378만여 필을 훨씬 넘는 487만여 정보, 1,911만여필의 토지가 조사되었다. 이는 1910년 말의 경지면적과 비교하면 경지 전체적으로 80%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면적의 증가는 은결이나 산지개간의 조사를 통하였다기보다는 1910년 말의 경지면적은 양안상의 결수에 의해 산출 되었는데 이 결수 산정이 실제 면적에 비해 낮에 이루어지고 과소 평과 되었기에 사업을 통해 급증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었다.
둘째, 경지면적의 증가는 당연히 지세부담에 편차를 가져왔다. 개정 전후 지세액의 증감을 전체적으로 볼 때 전라도와 함경도의 경우는 오히려 지세액이 감소하였고 경기·강원·경상도의 경우는 급증하였다. 이처럼 지역간의 격차가 나타나는 것은 과세방법이 결부법에 의한 것에서 지가에 의한 것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막대한 양의 국유지가 창출되었다. 사업을 통해 종래 소유권이 설정되지 않은 채 조선 농민에게 잠재적 소유지로 존재하던 미간지나 삼림·산야 등에 대하여, 민유지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뚜렷하지 않는 한 모두 국유지로 편입시켰다. 이는 조선의 관행은 전·답·대지의 경우에 한하여 그 소유권 귀속이 분명하고 기타의 토지의 소유권이 모호한 채 남아 있던 것을 사업을 통하여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지가 확정되고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 토지는 국유로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사업에서 작성된 토지대장에 기초하여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는 등기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일본 자본의 입장에서는 토지거래를 확대할 여건이 마련된 셈이었다.
다섯째, 사업을 통하여 새로운 행정조직의 관할구역이 분명해졌다. 1913년 일제는 군·면 통폐합으로 행정구역의 재편을 실시하였다. 여기서 나타난 새로운 행정조직은 종래보다 규모를 축소시키고 이 조직을 통하여 지방행정을 장악함으로써 식민지통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게 되었다.
4.식민지지주제의 성립
토지조사 과정에서 확립된 새로운 토지제도와 지세제도는 식민통치의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등기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전토지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국가적 토지소유는 마침내 철폐되었고 이러한 토지제도의 변화 속에서 기존에 일본인들의 토지소유는 다른 조선인 토지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이고 절대적인 안정성을 부여받았다. 지세제도의 확립은 식민지재정에 안정성을 부여하고 소유권조사 결과 창출된 국유지로부터 역둔토 수입도 재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사업이 완료될 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민이었다. 농촌에서 지주-소작관계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식민지지주제라고도 표현 되었는데 이러한 생산관계는 1910-20년에 더욱 강화되었다. 새로운 토지제도 아래에서 토지의 상품화는 이전보다 훨씬 본격화될 경향을 지니고 있었고 1910년대 후반이후 상품화의 진행과 가중되는 조세부담으로 몰락해가는 영세농을 소작농으로 흡수하면서 지주경영을 확대해갔고 토지조사사업은 이러한 과정을 매개로 하여 식민지지주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키워드
추천자료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 연구
공주 3.1운동
3.1운동의 의의와 전개
한국 경제 노트
[과외]중학 국사 3-2학기 기말 01 민족의 독립운동(교사용)
[과외]중학 국사 3-2학기 기말 01 민족의 독립운동
일제 식민시대 지방제도 개편과 참정권 문제 연구
독학사 1단계 - 국사 총정리 1vov_vov1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
이용도 목사 연구 (협성대)
[한국민족운동사] 농민운동의 전개 - 1910년대와 1920년대 농민운동의 발전, 농민단체의 출현...
[사회복지발달사] 일제식민시대의 사회복지.pptx
한국 경제 성장 요인
권영민,한국현대문학사1권 제2장 요약- 근대적 주체와 문학 양식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