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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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시대적 배경과 교회의 상황

3. 이용도의 생애와 사상형성의 배경

4. 이용도의 신비주의 사상의 성격

5. 이용도 신비주의의 특징

6.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의 영향과 그 평가

본문내용

맺으면서 필자는 그의 신비주의가 그 당시 교회에 주었던 영향력과 오늘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몇가지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그는 새로운 스타일(용도식)의 부흥회를 시작하였다. 그의 부흥회 스타일은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1907년의 부흥회와는 아주 다른 토착적인 신비주의 타입의 집회 형식이었다. 그는 사람을 인위적으로 모으려고도 하지도 않았고 조직하거나 선전하며 꾀를 부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설교를 하지 않고 기도만 몇 시간씩 하거나 또는 공중 기도를 3-4시간씩 시킴으로써 집회를 끝마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어떤 인간적 기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삶 전체를 청중들에게 문자 그대로 주는 것이었다. 집회기간동안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스스로가 은혜를 사모함으로써 청중들에게 그 本을 몸소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이용도 목사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뜨거운 열정을 배워야 하겠다.
순수하고도 맑은 영혼을 소유한 이용도 목사는, 현대문명에 오염되어 있는 오늘의 목회자의 모습과는 분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목회자는 하늘의 언어를 혼탁한 세속에 읊는 하나님의 시인(詩人)이다. 목회자의 고귀한 사명이 퇴색되어가는 오늘의 현실에 이용도 목사는 크나큰 귀감이 된다 하겠다.
둘째, 이용도 목사는 자기 만족에 빠진 당시 교계 지도자들 곧 선교사, 목사, 부흥사들에게 교만과 파벌 등에 대한 그들의 자성을 촉구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바리새적인 교리와 형식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였으나, 그는 새 생명의 바람을 전국 교회에 불러 일으켜 1930년대 초기의 교회를 부흥 내지 개혁시켰다. 1923년부터 계속 내리막길에 있었던 전국 교회의 교세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고 회복되었던 원인(原因)도 이용도의 개혁 운동 내지 그에게 자극을 받은 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셋째, 당시 그는 전국적으로 기도의 혁명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한국 교회에 기도가 없다는 것을 크게 한탄한 그는 자기 스스로가 기도에 미치고 기도의 사람이 됨으로써 기도의 열심에 불을 붙였고, 이러한 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들과 산골짜기는 기도할 곳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로 덮이게 되었다. 순수한 기도와 말씀과 눈물이 사라진 오늘의 한국 교회는, 기도와 말씀에 무장한 이용도와 같은 목회자를 회상하므로서 오늘 이 교회와 사회를 기도와 눈물로서 가슴 아파하며 새롭게 갱신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겠다.
넷째, 이용도 목사의 감화와 부흥 운동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평생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바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즉 유능한 청년들이 교역에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경우, 조신일, 이호운, 명관조, 김광우, 변종호, 김용련, 박재봉 목사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성직으로 부름 받아 해방 전후의 한국 교회를 실질적으로 재건 부흥시키며 성장시켰던 주역들이 되었다. 한국교회와 사회의 미래는 여전히 다음세대의 어깨에 걸려 있다. 그들의 희망에 불을 지펴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도록 교회와 시대의 선배들은 다음세대를 위해 기도의 눈물을 뿌려야 할 것이다.
다섯째, 서양과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신비주의 운동을 시도를 하였다. 그의 感의 神學에 기초한 설교와 전도 활동은 한국 교회의 신도들에게 광범위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목회 스타일과 신앙 양태는 지금까지 한국적 신앙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이용도 목사는 한국 문화신학의 기저에 '신비주의'의 고유한 수맥을 전개하였고 그 전통은 오늘의 자리에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 수맥을 한국인의 고유한 영성과 문화적 지평 위에서 창조적으로 융합해 나아가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이용도 목사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은 대체로 그가 너무 지나친 열광 주의자, 광신 주의자였다. 혹은, 부흥회 이후의 교육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혹은, 지나치게 개인주의화 되었다, 현실 도피적이었다, 또는, 낭만주의적 감상주의에 빠진 사람이었다, 혹은, 지나치게 영육 이원론을 강조하였다, 또는, 역사성이 결여 되었다. 부조리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개혁하고 변혁하려는 정치의식이 부재하였다. 사랑의 실천이 이 세계에서라는 역사의식이 결여되었다.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아무튼 그가 비록 많은 문제를 안고는 있지만, 우리는 이용도의 신비주의에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암흑시대에 사는 겨례의 아픔과 고난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용도의 신앙운동은 당시 민족 기독교의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극단의 신비주의적 운동이라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상처받은 민족과 민중의 가슴을 싸매고 치유하는 흔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용도는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고통과 투쟁했고 한국 교회의 부패와 싸웠다. 그는 교회를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교회는 그를 밀어냈고, 그는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정죄했다. 그의 몸부림은 차가운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마음속에서부터 울려나오는 예수에 대한 열정과 그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었으며 그의 선포는 교회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이용도 목사의 모습은 한신(韓國神學)에서 신학함(Doing Theology)을 배우는 우리가 참으로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兄아! 나는 나의 일에 대하여 아무 手段도 방법도 없는 것을 알아다오.
무슨 깊은 철학적 원리를 나에게 묻지 말아다오
죽음! 이것만이 나의 수단이오 방법이오 원리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날마다 죽음을 무릎쓰고 그냥 무식하게 돌진하려는 것뿐이다.
어느 날이든지 나의 빛없는 죽음! 그것이 나의 완성일 것이다.
형아! 나는 理없이 光없이 죽으려 한다.
뒤에 理있이 光있이 싸울 사자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나는 無理하게 죽을께 형은 有理하게 살아 주지 않으려나!
나는 法없이 條理없는 운동에 祭物이 되거든 형은 法적으로 條理있게 일하여다구!
이를 위하야 나는 먼저 떨어져 죽는 작은 밀알 한 알갱이가 되려 하노라"
) op,cit.,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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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2.10.24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8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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