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목차
-단절된 관계, 30대 독신녀
-관에서 꾸는 꿈, 오르페스와의 만남
-소외에서 벗어남, 끌어안기
-다시 시작하기
-<파니 핑크>의 느낌
-단절된 관계, 30대 독신녀
-관에서 꾸는 꿈, 오르페스와의 만남
-소외에서 벗어남, 끌어안기
-다시 시작하기
-<파니 핑크>의 느낌
본문내용
'나는 살아가는 거야'라고 느끼는 순간, 파니는 자신을 속박하던 관을 밖으로 던져 버린다. 23의 남자의 멋진 차에 쿵 떨어져 버린 관은 이제 그녀가 다시 자신의 삶을 죽음과 같은 것에 유폐시키지 않을 것을 보여 준다. 그녀는 친구, 삶과 단절되지 않을 것이며 설혹 힘든 시기가 닥쳐오더라도 그녀가 움츠러들지 않을 것은 충분히 추측 가능하다. 그녀는 오르페스의 예언대로 숫자 23의 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속물이 아닌 그에게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파니 핑크는 다시 시작한다. 첫장면 인터뷰에서 움츠러들던 그녀는 관을 집어 던지는 시원스런 동작으로 영화를 결말짓는다. 아마도 중간의 과정없이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본다면 이것은 커다란 비약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그만큼 풀어나가기 어려운 것이고 또 신기하게도 어이없이 해결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기에 논리적인 것을 집어 넣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라캉이란 학자는 '기표가 기의에 미끄러진다'라는 주장을 해서 우리가 사람들과 주고 받는 말이 왜곡을 일으키고, 이것이 심해지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세게 사이에 단절이 일어난다고도 했다. 사람이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말보다 그 사람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오르페스의 격렬한 춤과 기괴한 행동들이 파니의 마음을 열었다. 파니는 역시 알아듣기 힘든 주문과 동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버린다. '관계'의 시작과 회복에 꼭 이성적인 멘트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파니 핑크>의 느낌
파니 핑크가 관을 짜는 모습은 정말 진지하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전, 그녀는 자신의 삶이 죽음과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관을 짜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것과는 좀 다른 형태로, 나름대로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평안함을 느끼고 타인에게는 죽음과 가까워지는 연습을 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얘기한다. 자신이 만든 틀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데도 파니는 그것이 안식처라고 믿고 있다.
뺨에 핏기가 돌고 살아가고자 하는 자는 관 속에서 자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그 행복을 더 오래 맛보고 싶어하며 그래서 의도적으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이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임을 믿지 않는다거나, 죽음을 너무 생소하게 여겨도 문제겠지만,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에서 겸손함만을 배운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를 보면서 파니 핑크가 녹음기의 말을 따라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모습과 오르페스가 사라지는 것, 그리고 그녀가 오르페스의 말을 믿고 엉띄한 짓을 벌이는 것은 너무나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짜임새를 위한 너무 세심한 배려가 아닌가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장면들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 주고, 인물들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겠지만, 치밀한 짜임은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든다.
오르페스가 나름대로 만들어 낸 아프리카의 춤같은 몸놀림은 삶에 지쳐버린 사람들에겐 일탈의 행위와도 같다. 파니 핑크가 오르페스와 함께 그 흐느적거리면서도 힘이 실린 춤을 추는 장면은 파니가 세상의 대기 속에 가득한 삶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 <파니 핑크>에서 가장 감명이 느껴지는 장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시 태어나는 의식에 그러한 춤과 음악이 왠지 제일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을 집어던지는 장면과 함께 파니가 새롭게 나타난 23의 남자를 보고 오르페스를
떠올리는 것은 삶의 희망이요, 여유다.
파니 핑크는 다시 시작한다. 첫장면 인터뷰에서 움츠러들던 그녀는 관을 집어 던지는 시원스런 동작으로 영화를 결말짓는다. 아마도 중간의 과정없이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본다면 이것은 커다란 비약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그만큼 풀어나가기 어려운 것이고 또 신기하게도 어이없이 해결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기에 논리적인 것을 집어 넣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라캉이란 학자는 '기표가 기의에 미끄러진다'라는 주장을 해서 우리가 사람들과 주고 받는 말이 왜곡을 일으키고, 이것이 심해지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세게 사이에 단절이 일어난다고도 했다. 사람이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말보다 그 사람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오르페스의 격렬한 춤과 기괴한 행동들이 파니의 마음을 열었다. 파니는 역시 알아듣기 힘든 주문과 동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버린다. '관계'의 시작과 회복에 꼭 이성적인 멘트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파니 핑크>의 느낌
파니 핑크가 관을 짜는 모습은 정말 진지하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전, 그녀는 자신의 삶이 죽음과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관을 짜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것과는 좀 다른 형태로, 나름대로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평안함을 느끼고 타인에게는 죽음과 가까워지는 연습을 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얘기한다. 자신이 만든 틀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데도 파니는 그것이 안식처라고 믿고 있다.
뺨에 핏기가 돌고 살아가고자 하는 자는 관 속에서 자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그 행복을 더 오래 맛보고 싶어하며 그래서 의도적으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이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임을 믿지 않는다거나, 죽음을 너무 생소하게 여겨도 문제겠지만,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에서 겸손함만을 배운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를 보면서 파니 핑크가 녹음기의 말을 따라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모습과 오르페스가 사라지는 것, 그리고 그녀가 오르페스의 말을 믿고 엉띄한 짓을 벌이는 것은 너무나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짜임새를 위한 너무 세심한 배려가 아닌가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장면들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 주고, 인물들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겠지만, 치밀한 짜임은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든다.
오르페스가 나름대로 만들어 낸 아프리카의 춤같은 몸놀림은 삶에 지쳐버린 사람들에겐 일탈의 행위와도 같다. 파니 핑크가 오르페스와 함께 그 흐느적거리면서도 힘이 실린 춤을 추는 장면은 파니가 세상의 대기 속에 가득한 삶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 <파니 핑크>에서 가장 감명이 느껴지는 장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시 태어나는 의식에 그러한 춤과 음악이 왠지 제일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을 집어던지는 장면과 함께 파니가 새롭게 나타난 23의 남자를 보고 오르페스를
떠올리는 것은 삶의 희망이요, 여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