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항쟁과 진도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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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삼별초(三別抄)란?

◎몽고의 침략과 전화

◎삼별초의 난

◎진도 정부 용장성의 함락

본문내용

군과 맞서 싸우는데 적합하고 섬이 크고 기름져서 오래 버티더라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 명량해협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거두어진 조세를 개경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가야 할 이동로였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운을 차단당해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은 정부는 몽고와 손잡고 진도를 몇차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려 원종 12년 5월 15일 여몽연합군은 다시 진도를 공격, 10여일 동안 벌어진 격렬한 싸움에서 삼별초의 임금 '온'과 '배중손'은 죽음을 당하고 김통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간다. 제주도로 건너간 김통정 휘하의 삼별초는 3년간의 항쟁 끝에 원종 13년(1273) 2월에 여몽연합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삼별초가 3년 가까이 버틸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체의 뛰어난 전투력도 있지만 남도 각처의 민심이 이미 외적과 결탁하여 국민들을 쥐어짜는 고려 정부를 떠나 삼별초 반란군에게 호응하였음을 반영한다. '삼별초의 난"이 모두 진압된 뒤 고려왕실은 완전히 몽고의 종속정권으로 전락, 100여년을 보내게 된다. 이 때 고려 왕들은 원나라에 가서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원의 공주와 결혼한 후 고려로 와서 왕이 되었고 왕족과 고관들 사이에서는 몽고식 옷차림과 변발이 유행하기도 했다. 지금 성의 대부분은 허물어 졌으나 현재 궁궐터가 거의 복원되었고 석축으로 이루어진 건물자리 12개가 남아있고 그 주변에 420m에 이르는 토성이 남아있다. 사적 제126호로 보호되고 있다. 진도읍에서 의신면 돈지 가는 길로 운림산방 못미쳐 여몽 연합군에게 쫓겨 죽음을 당한 삼별초의 왕 '온'의 무덤이 왕무덤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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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6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8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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