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쓰는가? 장 폴 사르트르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어째서 쓰는가?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분개에 있어서만 가장 깊이 드러나는 것이다. 너그러운 사랑은 지지하겠다는 맹세다. 너그러운 분개는 변혁하겠다는 맹세다. 감탄은 본받겠다는 맹세다. 문학과 논리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심미적 요구의 근저에는 윤리적 요구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작품을 쓰는 사람은 쓰는 수고를 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로서 독자의 자유를 인식하기 때문이요, 읽는 사람은 책을 펼친다는 사실 만으로서도 작가의 자유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어쩐 면에서 보더라도 인간의 자유를 신뢰하려 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저자와 마찬가지로 독자가 자유를 인식하는 것은 오직 자유가 표현되기를 요구하기 위해서이므로 작품이란 「세계가 인간의 자유를 요구한다는 한에 있어서 세계의 가상적 표현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거기에 우선 「암흑의 문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아무리 어두운 빛으로 세계를 그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이 그 세계 앞에서 그들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만 있을 뿐이다. 나쁜 소설이란 독자에게 아첨하여 마음에 들것을 꾀하는 소설이지만, 좋은 소설이란 독자의 요구이며 자기 신조의 표현인 것이다. 특히 예술가가 작품 속에 여러 가지 자유와의 협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그 자유에 대하여 세계를 제시할 수 있는 면이란 항상 더 많은 자유를 침투시켜야 할 일면인 것이다. 작가가 깨우쳐 주는 너그러움의 개방이 부정을 축복하기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독자가 「사람에 의한 사람의 노예화」를 시인하고 받아들이며, 혹은 그것을 규탄하지 않고 방임하는 따위,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가 자기 자유를 누린다는 것도 또한 생각할 수 없으리라. 백인에 대한 증오가 작품 속에 퍼져있다 하더라도 미국의 흑인이 쓰는 소설이 훌륭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증오를 통해서 흑인이 요구하는 것은 자기 종족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도록 하므로, 나 자신은 순수한 자유 자체로 느끼는 순간에도 내가 그 압박하는 종족의 일원이라고 자각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리라. 백인종에게 반대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인 나 자신에게도 반대하여, 나는 모든 자유에 호소하여 마땅히 유색인종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반유태주의를 찬양한 따위가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자유가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를 불가분의 밀접한 연결 속에 있다고 느끼는 마당에서 그들 중의 몇몇의 노예화를 승인하기 위해서 내 자유를 행사하라고는 아무도 내게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필가, 팜플렛작가, 풍자시인, 소설가 등등, 그가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또 다만 개인적 정열을 이야기하던가, 사회제도를 공격한다 하더라도, 자유인들에게 호소하는 「자유인 작가」에게는 오직 하나의 주제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자유이다」.
따라서 독자를 굴복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작가를 예술 자체에 있어서 위협하는 것이다. 가령 파시즘이 어느 대장장이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그 개인으로서의 생활을 공격하는 것이지, 그의 직업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경우에는 그 쌍방이며, 그 생활에 있어서 보다도 직업에 있어서 더 타격을 받는 건이다. 전쟁 전에는 전력을 기울여 파시즘을 주장했으나 막상 나치스가 그들에게 명예를 주게 된 바로 그때에는 작품을 전혀 쓰지 못하게 된 작가들을 나는 보았다. 특히 드리오 라 로션이 생각난다. 그는 잘못 생각했다. 그러나 성실했고, 또 그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나치 사상이 주입된 어용잡지의 편집을 맡았다.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미 그때에는 자유롭게 대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분이 상했음을 드러냈다. 그는 이미 자기 독자를 느낄 수 없게 되어서 점점 성급히 굴었으나 자기가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징조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증오의 징조도 분노의 징조도 없이 그저 잠잠했다. 그는 방향을 잃고 점점 커지는 불안에 사로잡혀 독일 사람들에게 쓰라린 불만을 토로했다. 그의 논설은 훌륭했고, 차츰 신랄해졌다. 그 자신도 경멸하고 있던 변절한 저널리스트들이 맞장구를 치는 이외에는 아무런 반항도 없었다. 사표를 냈다가 다시 철회하고 또 펜을 들었으나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드디어 남들의 침묵에 제 입이 틀어 막힌 격으로 그도 그만 침묵하고 말았다. 그는 남들의 굴종을 요구했으나, 그 미친 머리로는 굴종도 일종의 자발적인 행위며 그래도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사실 굴종의 시기가 왔다. 인간으로서의 그는 크게 그것을 기뻐했지만 작가로서의 그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같은 시기에 딴 사람들은 (다행히도 그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문필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시민의 자유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사람은 노예를 위해 글을 쓸 수는 없다. 산문예술은 그 속에서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 유일한 제도, 즉 민주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다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한쪽이 위협을 받을 때는 다른 한쪽도 위협을 받는 법이다. 일단 위협을 받게 되면 그것을 펜으로 막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어느 날 펜을 놓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때가 오고야 만다. 그때는 작가도 또한 무기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분이 어떻게 작가가 되든지 간에, 여러분이 가르친 의견이 어떤 지간에 문학은 여러분을 싸움에 투입시키고야 만다. 쓴다는 것은 자유를 요구하는 어떤 수단이다. 여러분이 시작한 이상 좋아서이건 마지못해서이건 간에 여러분은 그곳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에 구속되어 있다는 거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는 배반에 직면한 방다의「성직자」와 같이 관념적 가치의 수호자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켜야 하는 것은 구체적·일상적인 자유이며, 작가는 정치적·사회적 싸움에 가담해야 하는가? 그 문제는 일견 지극히 간단하지만 아무도 자문해 보지 않는 또 하나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즉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문제다.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4.12.22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989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