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동기
2. 유래
3.연혁
4.행정구역 개편
5.자연환경
6.인구변화
7. 산업구조 변화
8.지명 유래
9.행정 구역도
2. 유래
3.연혁
4.행정구역 개편
5.자연환경
6.인구변화
7. 산업구조 변화
8.지명 유래
9.행정 구역도
본문내용
진기지로, 만선 귀향하는 어부들의 소리가 컸다하여 성포동이라 칭했다. 성포동의 자연취락은 신도시개발 때 모두 폐동되어 옛 성포리는 고층아파트(예술인 아파트, 주공고층아파트) 지역으로 변모되었고 옛 점성리는 택지로 조성되었다. 또 조선시대의 성포리는 어부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닷 내음이 물신 풍기는 곳이라면, 첨성리는 실학자 성호 이익선생이 80년간 은둔생활로 학문을 연마하던 조용한 마을이었다. 점성리는 광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역사학자들 간에도 광주 첨성리와 안산첨성리를 서로 혼돈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부언하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은 안산 첨성리 이고 죽어 문힌 곳은 광주 첨성리인데 신도시개발로 이들 지역이 성호 묘역외에는 모두 택지로 조성되어 현재는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소속되어 있다.
와 동(瓦 洞)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와상리와 와하리 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와리로 개칭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단원구 와동(安山市 瓦洞)으로 되었다.와동은 기와를 굽던 와골에서 유래되었고, 와골은 그후 조선중엽 수해로 광덕산 서쪽 낙맥이 무너져내릴 때 매몰된 후 농경지로 되었다가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와동 복지회관이 들어섰다. 와동은 신도시개발로 자연취락이 모두 폐동되어 대부분의 지역이 택지로 조성되었다.
월피동(月陂洞)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월피리라 칭하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따라 시흥군 수암면 월피리로 개칭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상록구 월피동(安山市 月陂洞)으로 되었다.본래의 이름은 다리피(月入陂)로 달뜨는 언덕받이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월피동은 예로부터 농토가 비옥할 뿐 아니라 월피천과 안산천등 하천이 있어 연년세세 풍년이 들어 부자가 많이 살던 곳이다. 신도시 개발로 모든 마을이 폐동되어 서쪽지역은 택지로, 동쪽지역은 아파트단지로 변모되었다.
선부동(仙府洞)
옛날에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던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선부리(그? 우물을 '석수골 우물'이라 함)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선부리와 달산리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로 개칭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安山市 仙府洞)으로 되었다.선부동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산대장)가 섰을 만큼적대던 곳이었다. 특히, 안산의 곽적성씨중 안산 김씨 후손중에 김맹전 (金孟銓)의 묘를 석수골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안산에 안산 성씨의 뿌리를 내렸다 한다.또한 이곳은 안산의 인맥중 가장 번성했던 파평 윤씨 소정공파 후손들의 주세거지이기도 하다.
원 곡 동 (元 谷 洞)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원상리와 모곡리라 칭했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원곡리로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安山市 元谷洞)으로 되었다.원곡동은 원상리(양지마을)의 '원(元)'자와 모곡리(?골)의 '곡(谷)'자를 취한것이며, 신도시 개발 후 취락이 폐동되자 원주민을 위한 이주단지가 조성되어 원주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원곡동 내에 있는 땟골은 예로부터 피난곳이라 하여 전란때만 되면 화를 면한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렸으며, 양지마을은 분묘가 많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안산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변모되었다. 또한 백성말은 처음에는 집 한채가 있었으나 장차 백가지 성이 살 곳이라 했는데, 이름 그대로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9.행정 구역도
와 동(瓦 洞)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와상리와 와하리 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와리로 개칭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단원구 와동(安山市 瓦洞)으로 되었다.와동은 기와를 굽던 와골에서 유래되었고, 와골은 그후 조선중엽 수해로 광덕산 서쪽 낙맥이 무너져내릴 때 매몰된 후 농경지로 되었다가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와동 복지회관이 들어섰다. 와동은 신도시개발로 자연취락이 모두 폐동되어 대부분의 지역이 택지로 조성되었다.
월피동(月陂洞)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월피리라 칭하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따라 시흥군 수암면 월피리로 개칭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상록구 월피동(安山市 月陂洞)으로 되었다.본래의 이름은 다리피(月入陂)로 달뜨는 언덕받이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월피동은 예로부터 농토가 비옥할 뿐 아니라 월피천과 안산천등 하천이 있어 연년세세 풍년이 들어 부자가 많이 살던 곳이다. 신도시 개발로 모든 마을이 폐동되어 서쪽지역은 택지로, 동쪽지역은 아파트단지로 변모되었다.
선부동(仙府洞)
옛날에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던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선부리(그? 우물을 '석수골 우물'이라 함)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선부리와 달산리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로 개칭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安山市 仙府洞)으로 되었다.선부동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산대장)가 섰을 만큼적대던 곳이었다. 특히, 안산의 곽적성씨중 안산 김씨 후손중에 김맹전 (金孟銓)의 묘를 석수골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안산에 안산 성씨의 뿌리를 내렸다 한다.또한 이곳은 안산의 인맥중 가장 번성했던 파평 윤씨 소정공파 후손들의 주세거지이기도 하다.
원 곡 동 (元 谷 洞)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원상리와 모곡리라 칭했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원곡리로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安山市 元谷洞)으로 되었다.원곡동은 원상리(양지마을)의 '원(元)'자와 모곡리(?골)의 '곡(谷)'자를 취한것이며, 신도시 개발 후 취락이 폐동되자 원주민을 위한 이주단지가 조성되어 원주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원곡동 내에 있는 땟골은 예로부터 피난곳이라 하여 전란때만 되면 화를 면한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렸으며, 양지마을은 분묘가 많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안산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변모되었다. 또한 백성말은 처음에는 집 한채가 있었으나 장차 백가지 성이 살 곳이라 했는데, 이름 그대로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9.행정 구역도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