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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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경새재의 전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문경새재의 유례와 지리적 중요성
1. 문경새재의 유례
2. 지리적 중요성
Ⅲ. 문경새재의 유적
1. 1관문
2. KBS촬영장
3. 조령원터
4. 교귀정
5. 꾸구리바위
6. 산불됴심비
7. 2관문
8. 3관문
Ⅳ. 문경새재의 전설
1. 군사적 요충지의 성격을 보여주는 전설
(1) 신립장군과 새재여귀
2. 산간지역 특성을 보여주는 전설
(1) 산신령이 살려낸 호랑이
(2) 어명에 죽은 산신령
3. 기타전설
(1) 혜국사와 공민왕
(2) 돌아앉은 주흘산
(3) 원님과 대장장이
(4) 구렁이 처녀귀신
(5) 왜구가 혈 지른자리
Ⅴ. 결론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렸더니, 하늘에서 말 두 필이 내려와 순식간에 기와를 올려줘서 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절을 완성하고 나니 산신당을 지어야겠는데 역시 돈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주지스님은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산삼 30뿌리가 있는 곳을 알려주어 그것을 캐내어 산신당을 세울 수 있었다. 산신당을 짓고 나서도 산삼은 남았는데, 남은 산삼을 어떤 중과 보살이 훔쳐 달아났다. 그 후 산삼을 훔쳐낸 중은 앉은뱅이가 되어 평생 고생하다가 죽었고 훔쳐간 산삼을 사서 먹은 사람은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실제로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혜국사 뒤의 암자쪽에서 산삼을 여러 뿌리 캤었다고 한다. 후에 공민왕이 혜국사로 피란왔을 때, 공민왕은 늘 뒷산으로 올라가서 나라평안을 기원했다. 그 뒷산에 임시대궐을 지어 매일같이 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대궐터이라 불렀다. 절이름 또한 공민왕이 나라사랑의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혜국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2) 돌아앉은 주흘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의 일이다. 도읍은 정했는데 도읍을 품으로 감싸주고 궁궐을 지켜줄 수 있는 주산이 없었다. 그래서 전국의 산에게 연락하여 도읍의 주산을 모집했다. 여러 산들이 앞을 다투어 도읍의 주산이 되기 위해 한양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주흘산은 이 소식을 뒤늦게 듣게 되어 열심히 한양으로 쫓아갔지만 이미 삼각산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였다. 크게 낙망한 주흘산은 돌아오는 길에 지쳐 이곳 문경읍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주저앉았기 때문에 주흘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며, 늦게 연락받은 것과 삼각산에 대한 한이 맺혀서 다른 산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자리잡아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고 한다.
(3) 원님과 대장장이
옛날에 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문경의 원님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원님이 된 선비가 각 마을의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양민처럼 변장하고 다니다가 한 곳에 이르렀는데, 풀무를 불어 대장질을 하고 있는 대장장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 때 원님은 담배를 꺼내 풀무질하는 불길에다 불을 붙였다. 대장장이는 담배불을 붙이는 걸 보고는, "재수 없다."면서 면박을 주었다. 그래서 원님이 하루 벌면 얼마나 버느냐고 물었다. 대장장이 하는 말이, "아버지 어머니한테 빚을 가리고 자식들한테는 빚을 놓다 보니 돈도 벌 여가가 없습니다."하는 것 이었다. 세상살이의 이치를 이렇게 쉽게 표현하고 있는 대장장이의 말에 감동한 원님은 그 대장장이가 지혜롭다 하여 상을 후하게 주었다. 그 이후로 대장장이는 풀무질을 하지 않아도 부모 자식들과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4) 구렁이 처녀 귀신
약 삼백 년 전 과거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문경새재를 넘어가다가 어느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하루 저녁 유숙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부녀가 살고 있었으며 딸의 용태가 아름다웠을 뿐더러 마음씨 또한 착해서 아버지는 늘 딸의 장래를 생각하여 오던 중이었다. 때마침 이 선비의 인품이 또한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므로 이를 승낙하여 수삼 일을 머물다가 과거길을 재촉하고 삼 년 이내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언약하고 떠났다. 처녀는 매일 선비가 장원급제하기를 치성 드렸다. 과연 그 선비는 대과에 합격하여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러나 옛 언약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삼 년이 지나도 언약한 남편이 돌아오지 않고 그 동안에 아버지마저 죽게 됨에 따라 처녀는 고생을 참다못해 남편을 원망하며 자살을 한 후 큰 구렁이로 변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이 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입었다. 지방 순시를 나선 선비는 우연히 이 이야기를 듣고 그제서야 이 구렁이가 그 처녀의 원귀임을 깨달았다. 선비는 크게 후회하였고 처녀의 혼을 위로코자 제사를 지내주었다. 제사를 지내자 뇌성 벽력과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뒤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선비는 이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현재의 마성면 신현리에 성황당을 짓게 하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5) 왜구가 혈 지른 자리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신립 장군이 조령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크게 패하게 되면서 문경 땅 역시 왜구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일본 놈들이 문경새재의 지세를 살펴 본 즉, 용해사골 뒷산에 조령산의 정기를 받아 큰 장수가 날 혈이 있었다. 그래서 왜구들은 그 자리에 큰 장수가 나지 못하도록 큰 말뚝을 박았다. 물론 왜구들을 몰아낸 후에 그 말뚝은 제거했지만 용해사골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큰 장수는 결국 나지 못했다고 한다.
Ⅴ. 결론
이번 답사를 통해 문경새재를 드라마 촬영지로만 쉽게 생각하였으나 거기에는 굉장한 볼거리와 우리 역사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1관문은 통과하는 순간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는 듯 했다. 수려한 경치와 맑은 공기를 마음껏 즐겼으며 옛 선인들의 행적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예로부터 문경새재는 지리상, 군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현재는 이화령으로 신작로가 나고부터 관광객이나 등산객들이 문경새재를 넘고 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경새재는 KBS태조왕건 촬영장으로 국민에게 널리 알려졌다. 문경새재가 유명해지고 볼거리가 많아진 데에는 동의 하지만 드라마 촬영을 위하여 촬영장 옆으로 지나는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쌓고, 1관문 앞에 벚꽃나무 수십그루가 베어진 것은 자연을 훼손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Ⅵ. 참고문헌
문경지, 문경시, 1994
유몽인, 『어우야담』, 한국문화사, 1996
http://www.applego.pe.kr/noname32.htm
http://www.dongbobooks.com/HTML/Book/main/trip/10.htm
http://www.ghil.com/webzine/magazine/57/themetrip.html
http://www.skynews.co.kr/skynews_main/travel/culture/culture_012.htm
http://thelefthand.hihome.com/etc/sub/seaj.htm
http://www.tourguide.co.kr/view.asp?code=AL05G241

키워드

문경새재,   전설,   역사,   야화,   답사,   기행,   유적,   촬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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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1.23
  • 저작시기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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