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들어가면서..
1. 책소개
2. 볼테르는 누구인가?
3. 책의 목차
Ⅱ.본론
1. 계몽사상가인 볼테르.
2. 볼테르는 무엇을 말하는가?
3.“낙천주의 캉디드”의 내용중에서..
4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
5. 책의 서평
Ⅲ.“캉디드”란 책의 느낌
1. 책소개
2. 볼테르는 누구인가?
3. 책의 목차
Ⅱ.본론
1. 계몽사상가인 볼테르.
2. 볼테르는 무엇을 말하는가?
3.“낙천주의 캉디드”의 내용중에서..
4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
5. 책의 서평
Ⅲ.“캉디드”란 책의 느낌
본문내용
의 낙천주의는 위기에 부딪혀야 마땅하다. 살 곳을 잃고, 연인을 잃고, 몽둥이찜질에, 사기는 뭐 언제나 당하는 것처럼 돼버린 지경에 대체 낙천주의가 가능이나 하단 말인가? 거기다 여행길에서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마치 세계 최고 불행한 사람 선발대회에 나온 선수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불행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그 중에는 존경하던 스승, 사랑하는 여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도 자신의 낙천주의에 매달린다. 이 모든 고통은 다 선善을 위한 것, 언젠가 자신은 행복해질 거라고.
하지만 캉디드의 그런 낙천주의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가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중에는 세상은 악惡이라고 믿는 염세주의자들이 많았고, 캉디드는 그들과의 토론을 즐긴다. 지독한 낙천주의자와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세상을 보는 법. 그들의 말은 나름대로 그럴 듯 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현실에 도움이 안 되긴 매 한가지이다. 불행한 현실 앞에서 이들의 그럴 듯한 토론은 무기력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철학이란,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행복해하고 슬퍼하고 살아가며, 사람은 생각한다. 행복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슬퍼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사고'의 능력이 있는 인간에게는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누구는 선善을 생각하고, 누구는 악惡을 생각하고, 누구는 무無를 생각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건 어떤 식으로든 '삶'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것도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나름의 생명과 역사를 갖게되었다. '삶'을 위한 철학이 아닌, '철학'을 위한 철학이 되어버릴 위험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나치게 철학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서, 자신의 철학에 빠져 그 철학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는 삶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 한다. 여자와 동성애를 탐닉하는 고상한 종교인들, 자신의 철학이 낙천주의이기에 불행한 자신의 삶을 최선의 상태라고 봐야하는 무기력한 철학자, 상대의 재력에 따라 친절의 정도가 달라지는 예의 바른 귀족들.
결국 불행이 불행의 꼬리를 무는 긴 여행은 끝이 나고, 캉디드와 그 일행이 택한 건 낙천주의도, 염세주의도 아니다. 여행이 끝나도록 그들의 토론은 결론을 맺지 못했고, 그 즈음 그들은 땅에 씨를 뿌리고 거두며 살아가는 시골의 한 농부를 만난다. 그리고 그 농부가 이제껏 그들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무슨 무슨 주의가 아니라 현재를 꽃 피울 수 있는 '노력'이라는 결말이다.
맥빠질 만큼 뻔한 결말이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결말을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삶이라는 긴 길을 가기 위해 이정표가 필요하지만, 그 이정표가 최종 목적지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현대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에 기여한 대가로, 고전은 종종 지금 사람들에게 뻔하게 읽힌다. 또다른 재미?랄까.^^
하지만 캉디드의 그런 낙천주의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가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중에는 세상은 악惡이라고 믿는 염세주의자들이 많았고, 캉디드는 그들과의 토론을 즐긴다. 지독한 낙천주의자와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세상을 보는 법. 그들의 말은 나름대로 그럴 듯 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현실에 도움이 안 되긴 매 한가지이다. 불행한 현실 앞에서 이들의 그럴 듯한 토론은 무기력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철학이란,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행복해하고 슬퍼하고 살아가며, 사람은 생각한다. 행복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슬퍼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사고'의 능력이 있는 인간에게는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누구는 선善을 생각하고, 누구는 악惡을 생각하고, 누구는 무無를 생각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건 어떤 식으로든 '삶'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것도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나름의 생명과 역사를 갖게되었다. '삶'을 위한 철학이 아닌, '철학'을 위한 철학이 되어버릴 위험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나치게 철학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서, 자신의 철학에 빠져 그 철학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는 삶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 한다. 여자와 동성애를 탐닉하는 고상한 종교인들, 자신의 철학이 낙천주의이기에 불행한 자신의 삶을 최선의 상태라고 봐야하는 무기력한 철학자, 상대의 재력에 따라 친절의 정도가 달라지는 예의 바른 귀족들.
결국 불행이 불행의 꼬리를 무는 긴 여행은 끝이 나고, 캉디드와 그 일행이 택한 건 낙천주의도, 염세주의도 아니다. 여행이 끝나도록 그들의 토론은 결론을 맺지 못했고, 그 즈음 그들은 땅에 씨를 뿌리고 거두며 살아가는 시골의 한 농부를 만난다. 그리고 그 농부가 이제껏 그들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무슨 무슨 주의가 아니라 현재를 꽃 피울 수 있는 '노력'이라는 결말이다.
맥빠질 만큼 뻔한 결말이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결말을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삶이라는 긴 길을 가기 위해 이정표가 필요하지만, 그 이정표가 최종 목적지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현대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에 기여한 대가로, 고전은 종종 지금 사람들에게 뻔하게 읽힌다. 또다른 재미?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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