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속의 이순신 인간성과 임진왜란의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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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난중일기」에서 본 충무공 이순신의 인간성

2.「난중일기」에서 본 임진왜란의 참상

본문내용

서 제사를 지낼 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무려 200여 명이나 산을 에워싸고 걸식하러 올라왔다가 물러갔다니 하니 놀라운 일이다.
19일 무술(P77) - 소비포 권관에게 영남 여러 배의 활 쏘는 격군들이 거의 다 굶어죽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20일 기해(P77) - 살을 에는 것같이 추워 배마다 옷 없는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위에 신음하는 소리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낼 차사원으로 녹도 만호 송여종을 정하여 보냈다.
*2월
초9일 무오(P84) - 당항포에 적선이 내왕하는지 알아보고, 또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 참상이 빚어지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살릴 것인지도 물어 보았다.
<병신년>
*윤8월
14일 무인(P236) - 지나온 전 지역이 온통 쑥대밭이 되어 비참한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정유년>
*7월
15일 갑진(P277) - 그로부터 수군의 배 20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통분할 노릇이다. 통제하고 방어할 방책이 없으니 매우 한스럽다.
16일 을사(P278) - 세남이 탄 배 및 다른 배 6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서 서생포 앞바다에 표류하여 뭍으로 오르려 할 즈음에 거의 살육을 당하고 세남만이 홀로 수풀 속으로 들어가 간신히 살아나 여기에 왔다는 것이다.
21일 경술(P280) - 낮에 점심을 먹은 후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명의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들과 백성들이 호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8월
초9일 정묘(P285) -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전파하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까닭에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관사에 들어가니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13일 신미(P285) - 초3일 행차한 후에 진주성의 정재산성과 벽견산성도 군대가 다 흩어지고 스스로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9월
19일 정미(P294) -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침범해 들어와서 인가와 창고에 불을 질렀다.
*10월
초1일 무오(P295) - 아산 집이 이미 적의 분탕으로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초9일 병인(P296) - 일찍 출발하여 우수영에 이르니 성 안팎에는 인가가 하나도 없고 또 사람의 자취도 없어 보기에 참혹했다. 저녁에는 해남의 흉악한 적들이 진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11일 무진(P296) -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하니 필시 적의 무리가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다.
13일 경오(P297) - 남해 향리 송언봉 및 신용 등이 적진 속으로 들어가서 왜놈들을 꾀어내어 지방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고 하니 통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무술년>
*9월
19일 신축(P313) - 아침에 좌수영 앞바다로 배를 옮겨 정박했더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참담했다.
*10월
초3일 을묘(P315) - 사선 19척과 호선 20여 척이 불타서 도독이 엎드러지고 넘어지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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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5.03.27
  • 저작시기2005.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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