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휘주부의 곡물농업
1. 지리와 인구변화
2. 각 현의 곡물 재배 상황
Ⅲ. {광잠상설집보}와 휘주부의 잠상농업
1. {광잠상설집보}의 구성과 특징
2. 각 현의 잠상 현황
Ⅳ. 맺음말
Ⅱ. 휘주부의 곡물농업
1. 지리와 인구변화
2. 각 현의 곡물 재배 상황
Ⅲ. {광잠상설집보}와 휘주부의 잠상농업
1. {광잠상설집보}의 구성과 특징
2. 각 현의 잠상 현황
Ⅳ. 맺음말
본문내용
들이 묘목의 효용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외부 반출을 규제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계현에 호상을 재배하는 일은 심연처럼 잠상 선진 지역에서 지방관이 부임하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누군가가 호상을 적계현으로 가져왔더라도 새로운 품종을 적극적으로 심을 농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새 품종은 재배 기술을 함께 터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0년 이후 적계현 농가에서 호상을 어느 정도 재배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단지 이곳 역시 차를 재배한 지역이라는 점,
) 嘉慶 『績溪縣志』권3, 「物産」, p.19.
토지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배 면적이 많았을 가능성은 낮다.
縣의 경우 가경시대 자료에 잠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상에 대해서는 그 장점을 논하면서 女桑, 荊桑, 魯桑, 桑, 桑 등을 언급하고 있으며, 壓條法, 種 法 등을 소개하고 있다.
) 嘉慶 『 縣志』권3, 「地理·物産」, p.28. 壓條法에 대해서는 강판권, 앞의 논문, p.11 참조.
그런데 가경 자료에서는 호상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적계현의 예에서 보듯 이현에서도 혹 호상을 재배하였더라도 그 시기는 19세기 중엽이전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더욱이 이 지역도 땅이 적은 곳이기 때문에 양잠과 뽕 재배자가 드물었다.
) 嘉慶 『 縣志』권3, 「地理·物産」, p.28.
祁門縣의 경우 동치시기 자료에 이곳 사람들이 蠶을 중시한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잠을 薰浴齋潔하여 길렀다. 그러나 뽕나무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잠을 기르는 것만으로도 뽕나무 재배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단지 어떤 뽕나무를 재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 역시 山限壤隔해서 이웃 풍속과 접할 기회가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19세기 중엽이전까지 호상을 재배했을 가능성은 적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누에를 기르는 것 외에 여자들은 땅이 척박하고 가난해서 목면을 짜고 이웃과 함께 방적하였다. 특히 이곳 사람들은 밤에는 사람을 나누어 작업하였는데, 이를 '婦功'이라 불렀다.
) 同治 『祁門縣志』권5, 「輿地志·風俗」, p.2.
요컨대 휘주부의 각 현의 잠상업은 지역 여건상 크게 성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잠상업이 농가에 차지하는 비중도 높지 않았다. 단지 자급자족조차 할 수 없는 양식부족을 메우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이곳 사람들은 목재업에 종사하였다. 왜냐하면 휘주부에는 산이 많아 목재 생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이 목재업에 본격 종사한 것은 남송시기부터였다. 이곳 사람들은 겨울에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장마철 계곡의 물이 불어날 즈음에 나무를 물에 띄워 운반하여 각지로 판매하였다. 명청시기에도 이러한 방식은 계속되었지만, 강소성과 절강성의 경제 발전에 따라 휘주에서 생산한 목재만으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이러한 목재업에는 源 출신들이 많이 종사했다.
Ⅳ. 맺음말
휘주부의 농업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天下之民이 목숨을 농업에 맡기지만, 휘주민은 목숨을 상업에 맡긴다. 장사아치들이 휘주를 통하는 길은 饒州 浮이고, 다른 하나는 浙省 杭嚴이다. 하루라도 쌀을 실은 배가 도착하지 않으면 백성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삼일 동안 쌀을 실은 배가 도달하지 않으면 굶어죽는다."
) 道光 『休寧縣志』권1, 「彊域·風俗」, p.36.
이처럼 휘주부에서도 척박하고 적은 토지 때문에 곡물을 재배하더라도 양식조차 충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득이 이웃한 강서 등지에서 양식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곳의 곡물 부족과 수입은 이곳 사람들을 糧商에 활동하도록 만들었다.
휘주부의 잠상 면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양식조차 자급자족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면적이 많을 리 없다. 이곳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식을 확보하는 일이기 때문에, 곡물을 재배할 땅에 뽕나무를 재배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이 잠상업에 크게 종사하지 않았던 것은 외부와 단절된 지형관계로 새로운 잠상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적계현의 예에서 보듯 선진 기술을 도입한 잠상업은 19세기 중엽 이후에 시작하였을 것이다.
휘주부의 지리환경은 이곳의 농업구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곳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상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지리환경 때문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부득이 곡물농업에 종사하기보다는 이곳에서 쉽게 생산할 수 있는 차업이나 목재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곡물이외의 업에 종사해서 양식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 嘉慶 『績溪縣志』권3, 「物産」, p.19.
토지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배 면적이 많았을 가능성은 낮다.
縣의 경우 가경시대 자료에 잠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상에 대해서는 그 장점을 논하면서 女桑, 荊桑, 魯桑, 桑, 桑 등을 언급하고 있으며, 壓條法, 種 法 등을 소개하고 있다.
) 嘉慶 『 縣志』권3, 「地理·物産」, p.28. 壓條法에 대해서는 강판권, 앞의 논문, p.11 참조.
그런데 가경 자료에서는 호상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적계현의 예에서 보듯 이현에서도 혹 호상을 재배하였더라도 그 시기는 19세기 중엽이전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더욱이 이 지역도 땅이 적은 곳이기 때문에 양잠과 뽕 재배자가 드물었다.
) 嘉慶 『 縣志』권3, 「地理·物産」, p.28.
祁門縣의 경우 동치시기 자료에 이곳 사람들이 蠶을 중시한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잠을 薰浴齋潔하여 길렀다. 그러나 뽕나무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잠을 기르는 것만으로도 뽕나무 재배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단지 어떤 뽕나무를 재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 역시 山限壤隔해서 이웃 풍속과 접할 기회가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19세기 중엽이전까지 호상을 재배했을 가능성은 적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누에를 기르는 것 외에 여자들은 땅이 척박하고 가난해서 목면을 짜고 이웃과 함께 방적하였다. 특히 이곳 사람들은 밤에는 사람을 나누어 작업하였는데, 이를 '婦功'이라 불렀다.
) 同治 『祁門縣志』권5, 「輿地志·風俗」, p.2.
요컨대 휘주부의 각 현의 잠상업은 지역 여건상 크게 성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잠상업이 농가에 차지하는 비중도 높지 않았다. 단지 자급자족조차 할 수 없는 양식부족을 메우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이곳 사람들은 목재업에 종사하였다. 왜냐하면 휘주부에는 산이 많아 목재 생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이 목재업에 본격 종사한 것은 남송시기부터였다. 이곳 사람들은 겨울에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장마철 계곡의 물이 불어날 즈음에 나무를 물에 띄워 운반하여 각지로 판매하였다. 명청시기에도 이러한 방식은 계속되었지만, 강소성과 절강성의 경제 발전에 따라 휘주에서 생산한 목재만으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이러한 목재업에는 源 출신들이 많이 종사했다.
Ⅳ. 맺음말
휘주부의 농업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天下之民이 목숨을 농업에 맡기지만, 휘주민은 목숨을 상업에 맡긴다. 장사아치들이 휘주를 통하는 길은 饒州 浮이고, 다른 하나는 浙省 杭嚴이다. 하루라도 쌀을 실은 배가 도착하지 않으면 백성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삼일 동안 쌀을 실은 배가 도달하지 않으면 굶어죽는다."
) 道光 『休寧縣志』권1, 「彊域·風俗」, p.36.
이처럼 휘주부에서도 척박하고 적은 토지 때문에 곡물을 재배하더라도 양식조차 충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득이 이웃한 강서 등지에서 양식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곳의 곡물 부족과 수입은 이곳 사람들을 糧商에 활동하도록 만들었다.
휘주부의 잠상 면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양식조차 자급자족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면적이 많을 리 없다. 이곳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식을 확보하는 일이기 때문에, 곡물을 재배할 땅에 뽕나무를 재배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이 잠상업에 크게 종사하지 않았던 것은 외부와 단절된 지형관계로 새로운 잠상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적계현의 예에서 보듯 선진 기술을 도입한 잠상업은 19세기 중엽 이후에 시작하였을 것이다.
휘주부의 지리환경은 이곳의 농업구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곳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상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지리환경 때문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부득이 곡물농업에 종사하기보다는 이곳에서 쉽게 생산할 수 있는 차업이나 목재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곡물이외의 업에 종사해서 양식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