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8 15 해방과 좌익 우익 세력의 대립
2. 좌우합작 운동
3. 김구와 이승만의 협조와 갈등과 김구의 방향 전환
4. 유엔 소총회의 남한 단선 결정
5. 남북 협상
2. 좌우합작 운동
3. 김구와 이승만의 협조와 갈등과 김구의 방향 전환
4. 유엔 소총회의 남한 단선 결정
5. 남북 협상
본문내용
보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하기 제 정당 단체들은 공동 명의로써 전조선 정치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 각층 각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은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투표로써 통일적 조선 입법기관을 선거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 기관은 조선 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4.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제정당 사회 단체들은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요인 공동성명서는 1. 소련의 제의대로 외국군대를 철거할 것, 2. 외군철거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약속함, 3. 외군철거 -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 - 임시정부 수립 - 보통선거에 의한 입법기관 설치 - 헌법제정 - 정식 정부 수립, 4. 남조선 단독 선거반대로 요약할 수 있다. 비록 협의 내용은 지켜지지 않은채 6 · 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의 낳았지만 남 북 협상의 역사적 의의는 기릴 만 하다. 우선 남과 북의 주요 지도자들이 두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에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민족국가를 건설하기위하여 노력한 증거물인 셈이다. 또한 남북지도자회의는 민중이 열망한 바였다. 당장에 통일정부를 세울 것 이라는 기대보다는 모두의 염원에 의해 움직였다는 데 의의가 깊다는 것이다. 남북지도자회의는 남과 북의 극단적인 대립, 그 중에서도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기 위하여 열렸다. 또한 제대로 되진 못했지만, 연백평야에 수리조합물을 내려보내는 것, 전기를 계속 보내주는 것에 대한 약속도 받아냈는데, 이와 같이 남과 북이 만나면 극단적인 대립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낼 수 있고, 남 북간의 문제를 협상과 대화로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강화시키게 된다.
우사연구회, 『남 · 북 협상』 (한울, 2000), p.220.
반면 이로 인하여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대한민국정부 수립과정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날 것을 예견하면서도 북행을 결행한 것은 민족과 역사 앞에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애국적 행동이었으나, 김일성의 단독정부수립에 말려들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던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살해당하였다. 김규식 역시 6 · 25전쟁 중 납북되어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서거하였다. 이로써 민족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된 민족 국가를 수립하려던 중간파 세력은 모두 근절되고 휴전 후 남한은 이승만 정권과 극우세력의 독무대가 되었고, 북한은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로써 아직까지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남북협상은 좌우 합작운동과 더불어 좌 · 우파 사이의 분열과 대립을 해소함으로써 남 · 북한의 분단을 저지하고 단일한 민족 국가를 수립하려 한 주체적이고 평화적인 통일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3.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하기 제 정당 단체들은 공동 명의로써 전조선 정치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 각층 각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은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투표로써 통일적 조선 입법기관을 선거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 기관은 조선 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4.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제정당 사회 단체들은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요인 공동성명서는 1. 소련의 제의대로 외국군대를 철거할 것, 2. 외군철거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약속함, 3. 외군철거 -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 - 임시정부 수립 - 보통선거에 의한 입법기관 설치 - 헌법제정 - 정식 정부 수립, 4. 남조선 단독 선거반대로 요약할 수 있다. 비록 협의 내용은 지켜지지 않은채 6 · 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의 낳았지만 남 북 협상의 역사적 의의는 기릴 만 하다. 우선 남과 북의 주요 지도자들이 두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에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민족국가를 건설하기위하여 노력한 증거물인 셈이다. 또한 남북지도자회의는 민중이 열망한 바였다. 당장에 통일정부를 세울 것 이라는 기대보다는 모두의 염원에 의해 움직였다는 데 의의가 깊다는 것이다. 남북지도자회의는 남과 북의 극단적인 대립, 그 중에서도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기 위하여 열렸다. 또한 제대로 되진 못했지만, 연백평야에 수리조합물을 내려보내는 것, 전기를 계속 보내주는 것에 대한 약속도 받아냈는데, 이와 같이 남과 북이 만나면 극단적인 대립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낼 수 있고, 남 북간의 문제를 협상과 대화로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강화시키게 된다.
우사연구회, 『남 · 북 협상』 (한울, 2000), p.220.
반면 이로 인하여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대한민국정부 수립과정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날 것을 예견하면서도 북행을 결행한 것은 민족과 역사 앞에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애국적 행동이었으나, 김일성의 단독정부수립에 말려들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던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살해당하였다. 김규식 역시 6 · 25전쟁 중 납북되어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서거하였다. 이로써 민족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된 민족 국가를 수립하려던 중간파 세력은 모두 근절되고 휴전 후 남한은 이승만 정권과 극우세력의 독무대가 되었고, 북한은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로써 아직까지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남북협상은 좌우 합작운동과 더불어 좌 · 우파 사이의 분열과 대립을 해소함으로써 남 · 북한의 분단을 저지하고 단일한 민족 국가를 수립하려 한 주체적이고 평화적인 통일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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