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의 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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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단군신화의 제문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1) 단군신화의 역사적 의미
2) 단군신화의 유형
3) 단군신화에 반영된 사회상
4) 단군신화의 제문제
3.결론

본문내용

설, 전한 문제·경제 시기설, 왕망 시기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오고 있다.
따라서 이 『관자』에 의거하여 기원전 7세기에는 이미 고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관자』에 담긴 사상은 전국 시대인들의 산물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한 주장을 개진하면서 이용한 자료자체는 그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전승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될 수 있을 뿐이며, 『관자』의 기사에 의거해 고조선의 구체적인 등장 시기를 규정할 수는 없는 바이다.
다음 조선에 관한 언급의 시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전국책』의 기록이다. 『전국책』권 29, 연책 1에 소진이 연 문후(기원전 361~333)에 대해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쪽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연의 국세와 대외관계를 논할 때에 주의할 대상이 되었던 세력집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기』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한편 『위략』에 의하면, 기원전 323년에 연후가 왕이라 칭하니 조선 후 역시 왕이라 칭하고, 양국 간에 갈등이 있었음을 전한다.
이런 문헌 기록들에 의할 때, 고조선은 늦어도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북중국 사람들에게 그 실체가 알려졌으며, 연의 동방에 있던 유력한 세력 집단으로서 연과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고대 중국인들에게 고조선의 실체가 알려진 시기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고조선 자체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을 수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고조선이 역사상에 등장하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문헌을 통한 추정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처럼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청동기문화가 보급된 시기는 구체적으로는 비파형 동검 문화의 성립시기는 기원전 10세기 전후이다. 자연 고조선의 등장시기 또한,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사이의 어느 시기로 상정해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고조선인들이 남긴 유물·유적들을 통해 추론해 보아야 할 것이며, 이는 앞으로 계속적인 조사 발굴과 연구가 요해지는 과제이다.
Ⅲ.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결과 단군신화에는 우리나라 최초 국가인 고조선이 성립되는 과정에서의 중요한 사건들이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경제활동에서 농경의 비중 증대, 사회 분화에 의한 공식적인 강제력의 발생, 천신족임을 자처하는 외래계 유이민 집단과 선주민 집단의 융합, 그리고 양 집단 결합의 산물로 대표성을 보장받게 된 지배자의 출현, 신성한 종교적 기능과 세속적인 정치적 기능을 한 몸에 아우른 지배자 단군왕검에 의한 통치 등이 환웅과 단군을 주인공으로 하여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말 그대로 단군과 관계된 신화이다. 즉 단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신화이다. 그런데 신화와 역사는 별개의 것이다. 단군신화의 내용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곰에서 변한 여자가 결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며 단군의 생존 년 수가 1000년을 훨씬 넘는 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과거 일본 학자들은 단군신화를 고조선과는 관계없는 후대의 조작으로 치부하였다.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단군왕검에 관한 자료 중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위서』라는 책의 문제이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지(三國志)』의 위서나 북위의 『위서』에는 단군과 관련된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가 반드시 현재 남아 있는 『삼국지』의 위서나 북위의 『위서』여야 한다는 보장은 없으며, 과거에는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인멸된 책 중에 『위서』라는 책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 다음으로는 단군신화의 내용 중에 후대적 요소들, 특히 불교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음을 근거로 단군신화는 고조선과 관계가 없으며 고려왕조시기에 들어와 승려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이 근거 없음은 이미 밝혀졌다. 신화는 애초 형성된 이후에 입으로 전해지고 또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많은 왜곡과 윤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으며, 단군신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삼국유사』 이후 여러 책들에서 이러한 변화과정이 쉽게 눈에 띈다. 『삼국유사』에서의 환웅과 웅녀의 결합이 『제왕운기』에서는 단웅천왕의 손녀와 단수신과의 결합으로 변질되며, 단군의 제위 년 수도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에 이르며 단군 개인의 재위 년 수가 아니라 단군이라는 보통명사를 갖는 왕들이 통치하는 왕조의 기간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도외시한 채 몇 가지 지엽적인 면만 가지고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사를 흔히 "반만 년 역사"라고 한다. 이는 우리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에 대한 자긍심의 표현으로서 단군이 국가를 건설한 시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단군은 우리 민족 전체의 조상도 아니며 우리 역사가 5000년 전에야 시작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역사의 옛 무대인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에서 인류가 등장한 것은 수십만 년 전의 일이며 기나긴 원시시대를 거쳐 고대국가가 탄생하면서 단군신화는 형성되었다. 즉 단군의 등장이라는 사건은 이미 우리의 역사가 한참 진행된 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사의 출발점이 아니라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과 관련된 건국신화이다. 비록 비현실적인 표현들로 꾸며져 있으나 그 속에는 고조선이 건국되는 전후시기의 역사적 사실들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고대의 신화가 역사적인 사실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충분한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사실 신화라는 것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이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반영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참고 문헌 ◁
단군신화, 어떻게 봐야 하나 권오영
역사적 실체로서의 단군 노태돈
단군신화의 연구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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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5.06.02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9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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