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신라 금석문 자료의 검토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머리말

2.금석문과 6세기 신라의 정치
(1)영일 냉수리 신라비
(2)울진 봉평 신라비
(3)울주 천전리 서석
(4)단양 신라 적성비

3.금석문과 6세기 신라의 역역동원체제
(1)명활 산성 작성비
(2)안압지 출토비
(3)남산 신성비
4.진흥왕 순수비

5.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원년인 568년에 진흥태왕이 순수관경하고 비문을 새겼다는 내용이 있다. 기사부분에는 유교적 정치사상에 입각하여 '제왕건호'(帝王建號)는 스스로 덕을 닦고 백성을 편안히 할 따름이며 진흥왕 자신이 태조의 기업(基業)을 이어 즉위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수가인명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문도인'(沙門道人), 즉 승려가 나타나는 점과, '이내종인'(裏內從人)·'집가인'(執駕人)·'약사'(藥師)·'당래객'(堂來客)·'이내객'(裏內客) 등 국왕의 근시(近侍) 집단으로 보이는 직명이 나타나는 점이다.
(4)마운령비
1929년에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의 운시산(雲施山)에서 발견된 비이다.
건립연대는 568년(진흥왕 29)이다. 검은색을 띤 화강암을 다듬어 양면에 글자를 새겼다. 앞면 10행에는 각 행에 26자, 뒷면 8행에는 각 행에 25자를 새겼다. 비문의 구성은 제기·기사·수가인명으로 되어 있다. 제기에는 태창 원년에 진흥태왕이 순수했을 때 세운 것임을 밝혔다.
기사부분은 대체로 황초령비와 같으며, 수가인명도 황초령비와 대략 같으나 결자가 적어 황초령비의 결락부를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황초령비에 보이는 직명 외에도 '급벌참전'(及伐斬典)·'내부통전'(奈夫通典)·'외객'(外客) 등의 직명이 보이는 것은 당시 국왕의 근시조직을 아는 데 참고가 된다.
5. 맺음말
이상으로 6세기에 만들어진 신라의 금석문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를 통해 당시 사회를 파악하였다. 본 보고서에서는 금석문 중에서도 석문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이 시대에는 국가의 공적인 사적비가 널리 작성되었는데 그것은 나름대로 특별한 시대상을 반영한다. 첫째 율령과 관련된 어떤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봉평비나 적성비를 그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을 수 있겠다. 둘째. 역역동원과 관련된 비이다. 남산신성비이나 명활산성작성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셋째, 국왕의 지방 순수나 이와 아울러 군사적인 목적의 행차와 관련된 비이다. 이른바 진흥왕 4비가 그런 사례에 속한다.
이들은 비문의 작성자와 읽어야 할 대상자를 놓고 보면 모두 국가와 지방민,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를 나타내어 주는 공통적 유형들로 되어 있다. 둘 사이에 놓여 있는 구체적인 사정은 비문마다 다르지만 그들을 연결하는 공통적인 매개고리로 기능한 것은 모두 어떤 법령의 시행이다. 이처럼 6세기에 사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비문이 널리 작성된 것은 구체적인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율령의 반포 및 그 대상 범위의 확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요컨대 6세기에 신라가 많은 書蹟을 담은 비문을 만든 목적은 새로운 율령적인 지배체제로 전환하면서 그 강력한 시행의지와 율령을 확산시키는 데 있었다. 사실 어떤 서적이 단지 일회성에 그칠 것이라며 종이나 또는 다른 유기질의 재료에 사용하여도 무방하였을 것인데, 굳이 단단한 석문을 작성한 것으로 보면 당시 자리잡아가던 법령이 반영구적으로 굳건하게 시행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참고 문헌
주보돈, 『금석문과 신라사』, 지식산업사, 2002
노용필, 『신라 진흥왕 순수비 연구』, 1996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5.06.07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050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