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들을 방관자적인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하게끔 하고 있다. 루니와 디디의 결합(결혼)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이 그렇다.(이들의 해맑은 웃음에 마음이 찡할 정도였다. 이들이 왜 정박아인지 사실 잘못된 것은 우리가 아닌지...)
또, 디디의 오빠였던 굽은 손가락인 크룩핑거가 말한 지옥 같은 세상의 단면을 보여준 피트까지도 결국에는 삶의 한 귀퉁이에 존재했던 하나의 양식으로 정의해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이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죽음은 삶의 일부이고 도리어 영화에서 보듯 인간 자체가 공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방자도 인간이다. 인간만이 삶을 이겨내고 책임질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인간적인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죽은 사람들이 밝은 모습으로 안토니아의 식탁에 나타난다. 그리고 안토니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동이 터 오는 시간에 임종을 맞이한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안토니아가 죽는다고 이 사회의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토니아는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고 안토니아가 죽은 후에도 바뀐 마을은 (생명이 탄생하고 어떤 자는 죽음을 맞고, 해가 지고 또다시 해가 뜨듯)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디디의 오빠였던 굽은 손가락인 크룩핑거가 말한 지옥 같은 세상의 단면을 보여준 피트까지도 결국에는 삶의 한 귀퉁이에 존재했던 하나의 양식으로 정의해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이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죽음은 삶의 일부이고 도리어 영화에서 보듯 인간 자체가 공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방자도 인간이다. 인간만이 삶을 이겨내고 책임질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인간적인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죽은 사람들이 밝은 모습으로 안토니아의 식탁에 나타난다. 그리고 안토니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동이 터 오는 시간에 임종을 맞이한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안토니아가 죽는다고 이 사회의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토니아는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고 안토니아가 죽은 후에도 바뀐 마을은 (생명이 탄생하고 어떤 자는 죽음을 맞고, 해가 지고 또다시 해가 뜨듯)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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