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에 관한 미스테리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3.결론

4.참고문헌

본문내용

를 기회로 활용한 골품귀족들의 음모에 의한것임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둘째, 우징을 도와 신무왕으로 즉위시킬 때, 장보고와 함께 청해진에서 활동했던 김양과 염장은 장보고의 해상세력이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음을 보인다.
셋째, 장보고의 해상 무역의 장악은 장보고의 청해진 진출 이전에 골품 귀족들과 토호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무역통제권을 빼앗은 결과가 된 것이므로 그들의 불만이 적지 아니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비무역의 경우, 양민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에 의하여 사람을 노비로 팔 경우 단순히 배에 탄 해상세력만으로 많은 노비를 일시적으로 납치하거나 사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 보다는 그 지방의 토호세력들과 결탁하여 일정지역의 하층민들을 집단으로 납치하거나 사다가 파는 형태가 일반적인 것이다. 장보고가 해상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이런 노비무역 등 밀무역활동을 못하게 된 신라의 기득권 집단(得 集)들의 장보고세력에 대한 저항의식도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김양은 신무왕, 문성왕 대를 이어 장보고에게 공로를 인정한 작위(感義軍使, 海軍)를 주고 있다는 사실과 장보고 세력의 방대함에 비추어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또 염장은 무주지역 호족세력(武州地域 豪族勢力)으로서 장보고의 청해진이 가지고 있는 해상 무역권을 소유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이는 장보고와 직접 관련된 김양과 염장의 경우이지만 그 시대 중앙골품 귀족이나 지방호족, 특히 장보고의 청해진 설진 이전의 해상세력들의 공통된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넷째, 장보고의 납비 문제는 신라의 골품제 진입을 통해 세력의 확대를 꾀하였다는 기() 연구에 동의할 수 없다.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번진으로서 신라왕과 동등한 입장에서 납비 문제를 요구하였다는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나『삼국유사』가 공히 염장에 의하여 장보고가 살해되자 곧 장보고의 난이 평정된 것으로 기록하고 다른 것을 전혀 기록한 바가 없다. 그러나 이소정(李少貞)의 전언을 기록한『속일본후기』는 장보고의 사후에 이창진등이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무진주의 별가(別駕)였던 염장에 의해서 평정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사로 미루어볼 때 장보고 사후에도 장보고의 무역활동을 이어오던 세력들은 남아서 나름대로 저항하였으나 염장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토착세력을 꺽지 못하고 일본(於呂係 등의 피난), 당나라(崔暈 등)등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장보고 사후 청해진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사료의 어디에도 없다. 다만『삼국사기』에는 851년 2월에 청해진을 폐지하고, 진의 주민들을 벽골군(전라북도)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만 있다. 이는 아마도 장보고 사후에도 청해진에서는 대규모든 소규모든 해상무역은 계속되었을 가능성과 그 과정에서 기존의 토호세력들과 크고 작은 마찰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장보고 사후 10년이나 지나서 청해진을 폐지하고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는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하지 아니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3.결론
지금까지 장보고에 대한 평가는 천양지차로 엇갈리고 있다. 특히 사서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왕권을 넘본 후안무치한 반역자요 권력의 화신이라는 비판과 군부 실력자이면서 국제무역을 통해 대부호로 만족하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추구했다는 의심을 샀으며 왕위계승 쟁탈전에 개입했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터 위에서 절대권력인 왕권의 외척 지위를 노리는 등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점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에 반해 긍정적 이미지도 있다.
우선 개인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것도 좋지만 업적을 평가하고 나서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 일고 있다.
실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도적이 진해장군 장보고를 죽였다고 평가한 점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그는 <동사강목>권 11에서장보고의 충의, 용력(勇力), 훈업(勳業)을 들어 주석지신(柱石之臣:주춧돌을 뜻함)이라고 평하고 그를 살해할 때 김양이 그를 구하는 말을 한마디도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고 밝혔다. 또 그의 죽음은 반역했다는 이름만 있고 실제 죄상이 없는 애매한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그리고 또한 9세기 신라 해양활동의 영역을 확장하고 민간 무역을 통해 국부를 축적했으며 해적선을 소탕하여 연해민의 평화로운 생업을 보장하였다. 아울러 신라인의 납치 매매를 근절시킨 바도 컸다. 주변국과의 독자적 무역 통로를 개척하여 우호 관계의 기반을 조성했다는 점도 높이 살 수 있다.
더불어 그가 등장한 역사적의의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그는 해상무역을 통해 중국의 청자문화를 신라에 도입되어 기존의 토기 문화를 청자문화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신라사회의 생활문화전반에 걸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게 했음은 물론 장보고 선단을 통해 일본에까지 전해져 일본사회의 생활문화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장보고 선단에 의한 청자문화교류가 갖는 의미는 나당일 3국의 문화교류사에서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동아시아 3국의 종교문화교류를 주도함으로써 불교의 한 분파인 선종이 신라와 일본에서 부흥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세계에서 처음으로 우리 민족 주도로 해상질서를 확립시켰고 해상 무역왕이 됨으로써 국민의 해양진출에 대한 진취적 의식을 고양시켰다. 특히 조공 중심의 관무역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민간 무역을 확대했으며 해상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상업 자본가의 출현을 촉진시켰다. 무엇보다 장보고의 유산을 계승한 왕건 선대의 해상세력이 성장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고려 왕국을 건국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장보고의 사망과 청해진의 폐진으로 인해 동아시아 해상세력의 주도권이 중국 상인들에게 넘어감에 따라 다시는 그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4.참고문헌
윤명철,『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학연문화사, 2002
최민자,『세계인 장보고와 지구촌 경영』범한, 2003
허일최재수강상택이창억 外 共著,『장보고와 황해해상무역』국학자료원, 2001
황상석,『장보고를 알면 세계가 열린다』눈, 1999
  • 가격2,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5.08.09
  • 저작시기2005.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915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