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를 통해서 본 통일신라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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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ꋗ8~9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시대상황

ꋘ장보고와 그의 세력
① 장보고
② 장보고 세력
③ 장보고 세력의 무역선

ꋙ청해진과 청해진을 통해서 본 무역
① 설치 배경
② 대외 교역을 통해서 본 청해진의 의의
1) 중국과의 교역
2) 일본과의 교역
3) 중동아시아와의 교역
③ 청해진의 혁파와 그 영향

ꋚ통일신라시대 해외교통
① 신라의 해상항로
② 신라의 해상운수
③ 신라의 해외무역

본문내용

고 기재되어 있다.
그 규모의 크기는 일찍이 일본의 쇼토구 천황 진고케이운 2년에 대신이 명을 받고 7,500톤의 잠사를 신라와 교역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이것은 상당히 대규모의 해상운수 사업으로, 상당한 규모의 조선업과 운수업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는 상당히 많은 민간조선업뿐만 아니라 상당히 거대한 국가가 경영하는 조선장이 있었으며, "위는 띠로 덮고, 아래는 문과 창을 만들고, 주위는 철망을 만들어 횡목으로 서로 연결하여 밖으로 내보내 목책으로 삼고, 그 면은 넓어서 끝까지 닿으며, 판책(板甥 : 널빤지로 된 平床살)을 쓰지 않고 다만 전목(全木)을 바로잡거나 휘어 굽혀 서로 비교하여 목질을 한다. 앞에는 정륜(닻의 바퀴)이 있고, 위에 큰 담장(칸막이)을 두고 돛 20여폭을 갖춘" 정도의 견당사절관선은 항로가 이웃의 당과 일본의 동방해상사로(東方海上絲路)를 운행하였다.
화물과 여객을 동시에 실을 수 있는 운수선도 있었다. 일본견당사가 이러한 신라 행상운 수선을 빌려 썼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일본 상인, 혹은 일본 입당 혹은 입신라의 유학 생, 학문승 등이 신라 해상운수선에 탑승했다. 한편 당시 중국 양주에는 6개의 커다란 국가가 경영하는 조선장이 있고, 초주의 바다 입구 에 대규모 해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여기서 만들어진 해선은 『구당서』최융전에 의하면, 천하의 여러 진은 주선이 모이는 곳이다. 옆으로는 파촉과 통하며 앞으로는 가는 (배는)민 월을 향한다. 일곱 연못과 열 늪, 세 강과 다섯 호수가 황하와 낙수 유역을 견제하고, 회수 와 바다를 포괄하면서 (교역한다). 가함과 같은 큰 배가 천축(千 ) 만소(萬 )나 된다. 교역을 하고 (배가)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동틀 무렵의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이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당의 수운과 조선으로 유명한 당시의 회남도의 초주와 하남도의 등주 지역까지도 결코 신라의 해외항운업을 대치하지는 못하였다. 그 곳들도 신라의 해상운수선 대 만큼 배를 보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인이 만든 배의 선장(船場)은 당의 동남연 해항운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당의 대 한반도와 대일본의 해상교통의 중요한 보완적 역할을 하여 통일 신라가 해상교통 사업 발달의 거대한 역사적 업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③ 신라의 해외무역
: 통일신라시대의 해외무역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조공형식으로 나타난 호시(互市)로 조공을 온 사람은 '방물(方物)'을 헌납하고, 조공을 받은 쪽은 예물을 준다. '방물'은 토산으로 중국의 『서경』 여오편에 이미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모두 그들 고장의 산물을 헌납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신라의 대당 조공토산물은 『구당서』신라전 당 고조 무덕(武 德) 4년(621)조의 기재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이 "사절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이에 고조 이연은 사절을 보내 보답하고 "새서와 화병풍, 그리고 면사 3백단을 하사했다." 비록 신라가 어떤 종류의 '토산물'을 보냈는지 기록은 없지만 대종 대력 8년(773)조의 기재에 의하면 신라 건운왕은 "사절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금 은 우황과 어아주 조하주 등의 물품을 헌납했다"고 되어 있다. 『신당서』신라전 당 현종 개원년간의 기재에 의하면 신라 흥광왕은 사신을 보내 "수차례 입조하고, 과하마(果下馬) 조하주 어아주(魚牙紬) 바다표범가죽 등을 헌납하고" 또한 "이 구마(異狗馬) 황금 미체(美笙) 등의 물건"을 헌납했다. 현종 이융기는 이에 "서문금(瑞文 錦) 오색라(五色羅) 자수문포(紫 紋袍) 금은으로 정제된 기명(器皿)을 하사했다." 신라는 당조에 방물을 조공하는 것 이외에 계집아이를 바쳤다. 계집아이를 바치는 일은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이상을 통해 볼 때, 관방의 조공 중에는 진귀한 동물, 이수(異獸), 진귀한 보석, 향약, 비단, 금은, 화폐, 그리고 심지어 계집아이와 기술자 등 희귀하고 귀하여 가치를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조선통사』에서 말하듯 신라 사절은 매번 당에 올 때마다 많은 예품 을 가져왔고, 이에 당에서는 '사물(賜物)'을 함으로써 예를 다하였다. 당의 사절이 신라에 갈 때에도 역시 예물을 교환하였다. 이러한 예물은 실제로는 상품이다. 예품의 교환은 실제상은 양국 국정과 정부 간에 진행된 국가무역이었다.
비록 이와 같은 대등하지 못한 조공호시(朝貢互市)식의 무역이 즉각적으로 민생에는 보탬 이 되지 못하였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는 이 같은 관방의 조공이 물질적인 교환뿐만 아니라 문화의 교류, 그리고 쌍방의 정치적 진보, 경제발전과 문화적 번영에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장기적인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이로인해 옛부터 조공무역은 쇠퇴하지 않고 발달하였다. 당연히 관방의 조공무역의 배후에는 늘 대규모 조공 사절단의 사적인 호시 무역활동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조공무역은 신라와 당, 신라와 일본, 그리고 일본과 당, 일본과 신라, 뿐만 아니라 당과 신라, 일본의 사절단 왕래에서 명백히 존재하였던 관방무역으로 서로간의 문화교류와 발전에 직 간접적으로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 조공무역 외에 또 한 종류의 무역은 민간의 호시 무역이다. 통일신라시기와 당의 민간무역 에 있어서 당과 신라의 해상교통의 주요한 항구는 하남도 등주의 문등현, 회남도 초주의 산 양현과 같이 특히 신라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항구로, 신라와 당의 민간무역이 집중적으로 이 도시들에서 일어났다. 가장 큰 상품의 교역지 중의 하나는 당의 동남 최대의 상업도시 양주로, 동서양 국제무역의 도시라고 볼 수 있으며, 진귀한 보물과 향로, 약초와 비단, 도자기, 차, 동기, 복장, 심지어 선박에 이르기까지 매매되었다. 또한 이 곳은 대식(大 食), 파사, 신라인들이 가장 집중되어 있었던 시장으로, 집중거주지인 '파사장'과 '신라방', 화물집하장인 '저' 등을 집중적으로 설치하고, 화물판매장고인 '점'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십리 장가'라는 야시 거리까지 설치하였다.
<참고 문헌>
김주식·김정술 『장보고 시대』
김부식 『삼국사기』
일연 『삼국 유사』
윤명철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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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26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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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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