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통제하에 두고서 인정한 것이었다. 물론 국가의 이러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밀무역은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다.
금(金)이 건국된 후에는 국신물을 교환하는 공무역이 중심이 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사무역도 행해졌다. 은폐·의대·포·채백·금견 등을 금에 수출하였으며, 금·말·화살·철갑옷 같은 무구류, 담비가죽·청서가죽·족제비털 등을 수입하였다. 금나라에 파견되는 사행(使行)은 무역의 이익을 노려 많은 물품을 가져가 교역할 수 있어 큰 이익을 보장하였기에, 다투어 파견되기를 희망하였다. 고려와 금 사이에는 사행무역 이외에, 국경선 부근에 각장(場)을 설치하여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였다. 압록강 방면에는 의주와 정주에서, 동쪽으로는 정평과 청주에서 각장 무역을 하였다. 각장 무역이 주는 경제적 이익은 국가재정으로나 상인 개인들에게 대단히 큰 것이었다. 고려왕실조차도 이 각장을 이용한 교역을 하기도 하였다. 각장 무역에서는 고려의 쌀과 저포가 금측(金側)의 견사나 비단·은 등과 교환되었으며, 북방국가의 정권교체로 변방이 혼란스러울 때에는 고려측의 미곡이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각장 무역은 12세기 초 요·금 교체기나, 13세기 초 금·원 교체기와 같이 북쪽 변방에서 변화가 생길 경우에는 국가의 안전을 위하여 폐쇄되기도 하였다.
아라비아는 당시 대식(大食)이라 불리었는데, 이 대식국인은 당대(唐代) 이래로 남중국의 광주를 중심으로 무역을 해 왔으며, 송대에 이르러 송의 해외 무역 장려책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다. 그들은 당시 남중국 연안에 출입하면서 송상의 고려무역에 자극되어 고려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수은·점성향(占城香) 등 진귀한 물품을 바치고 금과 비단을 받았다. 아라비아 상인의 내왕에 관한 기사는 3회에 그쳐, 고려와 그들 사이에 지속적인 무역활동이 행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송상인이 고려와 아라비아 상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의 교역은 외교 관계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민간차원에서 행해졌으나, 문종 10년(1056) 일본 사신이 고려에 온 것을 계기로 활발해졌다.
일본 상인들은 빈번히 고려에 와서 토산물을 바치는 사헌무역을 하였다. 일본의 장원귀족들이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에 적극 나섬으로써 고려에 내항하는 상인이 증가하자, 고려는 진봉선을 1년에 1회 2척으로 제한하는 등 규제를 가하였다. 11세기 후반 이후 일본과의 무역은 주로 진봉선에 의해 금주객관에서 이루어졌다. 무인정권시기에는 구주지역의 지방세력들이 적극적으로 교역에 참가하였으며, 고려의 상인들도 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 이후로는 거의 교역이 단절되었다. 일본에는 인삼·쌀·콩·마포·서적과 중국산 비단을 수출하고, 수은·유황·진주·소라·해조·거울상자·벼루상자·책상·향로·부채 등과 칼·활·화살·갑옷 같은 무구류, 그리고 후추·단목·침향·물소뿔 같은 남방산 물품을 수입하였다. 고려후기 원의 간섭하에선 주로 원과 교역하였다. 고려는 원과 단일한 경제권에 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을 통해 세계시장과 연결되었으므로, 고려후기의 대외교역은 어느때보다 활발하였다. 처음에는 원이 남송이나 일본 정복전쟁에 필요한 말과 군량을 확보하고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고 강제교역을 시행하여 엄청난 경제 부담을 주었다. 원과 공무역은 왕이 원 방문 또는 사신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에서는 예물을 보내고 원에서는 답례품을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교환에서 고려는 금·은 세공품과 자기·직물류·가죽을 보내고, 원에서는 금·은·비단·목면 등을 받아왔다. 빈번한 왕실간의 교류로 왕실이 무역의 주체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공무역도 성행하였지만, 사무역도 활발하였다. 사무역의 한 형태는 왕이나 사신의 수행원에 의한 것이었다. 대규모의 수행원은 사적인 교역을 하였으며, 상인들도 이들과 결탁하여 사무역을 하였다. 상인들은 말·모시·베·인삼 등을 가지고 가서 팔고, 다시 명주비단·능라비단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원의 상인들도 고려에 와서 활발히 무역하였다. 원과 교역에 편승하여 우마·금·은 등이 유출되었는데, 은의 유출은 고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국제교역은 육로를 통해서도 이루어졌지만, 해로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거란이나 금과는 주로 육로를, 송·아라비아·일본과는 해로를 통해서 교역하였다. 원의 경우는 육로와 해로 두가지가 모두 활용되었다. 해로를 통해 고려에 오는 경우, 개경에 이르는 관문인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벽란도는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드는 국제상도시였으며, 이곳에서 많은 물자가 교류되었다. 이곳에는 국가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국가의 허락없는 상행위를 통제하였다. 벽란도는 국제항으로서 번성하였는데, 이곳에서 개경에 이르는 도로는 상인의 왕래로 번잡할 정도였다. 고려와 외국의 활발한 경제교류는, 고려의 국내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거래되는 물품은 비단이나 서적, 기타 귀중품이나, 무구류가 중심이 되어, 일반 서민들과는 관계없는 귀족이나 왕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이었다. 따라서 국제교역은 귀족층을 대상으로 한 교역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서민들은 귀족이 외국에 매각할 물품을 생산하거나 헐 값에 탈취당하였으며, 귀족들의 소요품 구입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큰 고통을 겪었다.
국제교역의 성행은, 고려 경제 전체를 활발하게 하였으며, 고려의 국제적인 위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무역을 중심으로 한 국제교역은, 조선 시기 조공무역으로 제한되면서 활기를 잃어갔다.
-참고 문헌-
金庠基, 「麗宋貿易小考」 『震檀學報』7, 1937
李龍範, 「麗丹貿易考」 『東國史學』3, 1955
全海宗, 「麗·元貿易의 性格」 『東洋史學硏究』12·13합집, 1978
羅鍾宇, 「高麗前期의 麗日貿易」 『圓光史學』1, 1981
張東翼, 「麗·元의 經濟的 關係」 『高麗後期外交史硏究』, 1994,
일조각 채웅석, 「상업과 수공업」 『고려시대사강의』, 1997,
최광식외,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2002,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
금(金)이 건국된 후에는 국신물을 교환하는 공무역이 중심이 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사무역도 행해졌다. 은폐·의대·포·채백·금견 등을 금에 수출하였으며, 금·말·화살·철갑옷 같은 무구류, 담비가죽·청서가죽·족제비털 등을 수입하였다. 금나라에 파견되는 사행(使行)은 무역의 이익을 노려 많은 물품을 가져가 교역할 수 있어 큰 이익을 보장하였기에, 다투어 파견되기를 희망하였다. 고려와 금 사이에는 사행무역 이외에, 국경선 부근에 각장(場)을 설치하여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였다. 압록강 방면에는 의주와 정주에서, 동쪽으로는 정평과 청주에서 각장 무역을 하였다. 각장 무역이 주는 경제적 이익은 국가재정으로나 상인 개인들에게 대단히 큰 것이었다. 고려왕실조차도 이 각장을 이용한 교역을 하기도 하였다. 각장 무역에서는 고려의 쌀과 저포가 금측(金側)의 견사나 비단·은 등과 교환되었으며, 북방국가의 정권교체로 변방이 혼란스러울 때에는 고려측의 미곡이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각장 무역은 12세기 초 요·금 교체기나, 13세기 초 금·원 교체기와 같이 북쪽 변방에서 변화가 생길 경우에는 국가의 안전을 위하여 폐쇄되기도 하였다.
아라비아는 당시 대식(大食)이라 불리었는데, 이 대식국인은 당대(唐代) 이래로 남중국의 광주를 중심으로 무역을 해 왔으며, 송대에 이르러 송의 해외 무역 장려책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다. 그들은 당시 남중국 연안에 출입하면서 송상의 고려무역에 자극되어 고려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수은·점성향(占城香) 등 진귀한 물품을 바치고 금과 비단을 받았다. 아라비아 상인의 내왕에 관한 기사는 3회에 그쳐, 고려와 그들 사이에 지속적인 무역활동이 행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송상인이 고려와 아라비아 상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의 교역은 외교 관계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민간차원에서 행해졌으나, 문종 10년(1056) 일본 사신이 고려에 온 것을 계기로 활발해졌다.
일본 상인들은 빈번히 고려에 와서 토산물을 바치는 사헌무역을 하였다. 일본의 장원귀족들이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에 적극 나섬으로써 고려에 내항하는 상인이 증가하자, 고려는 진봉선을 1년에 1회 2척으로 제한하는 등 규제를 가하였다. 11세기 후반 이후 일본과의 무역은 주로 진봉선에 의해 금주객관에서 이루어졌다. 무인정권시기에는 구주지역의 지방세력들이 적극적으로 교역에 참가하였으며, 고려의 상인들도 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 이후로는 거의 교역이 단절되었다. 일본에는 인삼·쌀·콩·마포·서적과 중국산 비단을 수출하고, 수은·유황·진주·소라·해조·거울상자·벼루상자·책상·향로·부채 등과 칼·활·화살·갑옷 같은 무구류, 그리고 후추·단목·침향·물소뿔 같은 남방산 물품을 수입하였다. 고려후기 원의 간섭하에선 주로 원과 교역하였다. 고려는 원과 단일한 경제권에 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을 통해 세계시장과 연결되었으므로, 고려후기의 대외교역은 어느때보다 활발하였다. 처음에는 원이 남송이나 일본 정복전쟁에 필요한 말과 군량을 확보하고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고 강제교역을 시행하여 엄청난 경제 부담을 주었다. 원과 공무역은 왕이 원 방문 또는 사신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에서는 예물을 보내고 원에서는 답례품을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교환에서 고려는 금·은 세공품과 자기·직물류·가죽을 보내고, 원에서는 금·은·비단·목면 등을 받아왔다. 빈번한 왕실간의 교류로 왕실이 무역의 주체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공무역도 성행하였지만, 사무역도 활발하였다. 사무역의 한 형태는 왕이나 사신의 수행원에 의한 것이었다. 대규모의 수행원은 사적인 교역을 하였으며, 상인들도 이들과 결탁하여 사무역을 하였다. 상인들은 말·모시·베·인삼 등을 가지고 가서 팔고, 다시 명주비단·능라비단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원의 상인들도 고려에 와서 활발히 무역하였다. 원과 교역에 편승하여 우마·금·은 등이 유출되었는데, 은의 유출은 고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국제교역은 육로를 통해서도 이루어졌지만, 해로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거란이나 금과는 주로 육로를, 송·아라비아·일본과는 해로를 통해서 교역하였다. 원의 경우는 육로와 해로 두가지가 모두 활용되었다. 해로를 통해 고려에 오는 경우, 개경에 이르는 관문인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벽란도는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드는 국제상도시였으며, 이곳에서 많은 물자가 교류되었다. 이곳에는 국가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국가의 허락없는 상행위를 통제하였다. 벽란도는 국제항으로서 번성하였는데, 이곳에서 개경에 이르는 도로는 상인의 왕래로 번잡할 정도였다. 고려와 외국의 활발한 경제교류는, 고려의 국내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거래되는 물품은 비단이나 서적, 기타 귀중품이나, 무구류가 중심이 되어, 일반 서민들과는 관계없는 귀족이나 왕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이었다. 따라서 국제교역은 귀족층을 대상으로 한 교역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서민들은 귀족이 외국에 매각할 물품을 생산하거나 헐 값에 탈취당하였으며, 귀족들의 소요품 구입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큰 고통을 겪었다.
국제교역의 성행은, 고려 경제 전체를 활발하게 하였으며, 고려의 국제적인 위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무역을 중심으로 한 국제교역은, 조선 시기 조공무역으로 제한되면서 활기를 잃어갔다.
-참고 문헌-
金庠基, 「麗宋貿易小考」 『震檀學報』7, 1937
李龍範, 「麗丹貿易考」 『東國史學』3, 1955
全海宗, 「麗·元貿易의 性格」 『東洋史學硏究』12·13합집, 1978
羅鍾宇, 「高麗前期의 麗日貿易」 『圓光史學』1, 1981
張東翼, 「麗·元의 經濟的 關係」 『高麗後期外交史硏究』, 1994,
일조각 채웅석, 「상업과 수공업」 『고려시대사강의』, 1997,
최광식외,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2002,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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